결국 우리가 정신을 고찰하는 첫번째 단계는 어린이의 정기(精氣)에겨길 수 있다. 거기서는 우리가 동양적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정신과 자연의 통일이 지배한다. 이러한 자연적 정신은 여전히 자연에 머두른 채로 있는 자존적인 것이 아니므로 아직 자유롭지도 않고, 또한자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그러한 정신이다. 물론 정신이 놓여 있는이러한 상태에서도 우리는 국가와 예술과 학문의 단초를 엿볼 수는 있으나, 이는 모두가 자연을 지반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와 같은최초의 가부장적 세계 속에서는, 정신적인 것도 단지 개인이 그의 우연적 속성으로서 첨가되어 있는 데 불과한 하나의 실체이다. 즉 여기서모든 타자는 마치 어린이나 하인과 같이 한 사람의 의지에 속해 있을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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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반의하며 살아야 할 때도 영혼은 나를 위해 머리로는 미처 상상도하지 못하는 더 나은 것을 비축하고 있으리라 확신하고 즐겨라. 마음에대한 신뢰를 더욱 키우고 영혼과 보다 자주 접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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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정치판의 구성을바꾸는 데 군사력만큼 확실하고, 강력한 변수도 없다. 군이 장부상으로관리될 때는 큰 위험이 없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동원되어 사단이형성된다.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생기고, 전쟁을 통해 상하 간에끈끈한 연대가 생긴다.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바로 가장 강력하고새롭고, 군대까지 거느린 신흥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전통 귀족들에게 이것은 직접적인 위험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차라리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는 것이 손해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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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의문이란 ‘좀 이상하군! 정말 그런가? 하는데으로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질문‘ 이란 만드는 것이다. 느낀 의문은 그대로 놔둘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을 만든다는 것은 대답하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의문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스스로 나서서 그 의문을 풀어가고자 하는 자세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답하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으로 표현하고 다시 접근함으로써 처음에 느낀 의문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의문과 질문의 결정적인 차이는 의문이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질문은 스스로 그 답을 찾고자 하는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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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는 정확히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 즉 창조된 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해 제기된 질문에 대해, 우리는삶의 관찰과 실험에 토대한 경험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뷔리당의 당나귀 상황에 놓인 인간은 제비를 뽑을 것이고, 따라서 곤란에서 벗어난다. 바로 여기에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조작, 실험을 통해 자* 의지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조작이 존재한다. 유사한 상황에 처한 어린이가 제비뽑기를 통해 그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하는 실험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현상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감지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심리학적 실험이 실험적 철학으로 변형된다는, 아흐의 실험 대상 중 한 명의 의견을 이미 인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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