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를 그토록 재미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도처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충격적 모순과 비극적 역설입니다. 그것들은 매번 이해에 대한 인간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통제감에 대한 확신을 잃게 하는 폭력들을 방치합니다. 

폭력과 허무주의는 인간성의 말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현대 예술이 가장 자유롭고 순수한 계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기술이 야기한 비인간화에 대한 평형추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인간의 정신생활이 직간접으로 과학과 기술에 봉사하는 부분으로만 제한됩니다. 그래서 그 밖의 인간적 흥미와활동은 모두 ‘비객관적‘이고 감정적이며 따라서 비실제적인 것으로억압됩니다. 

기술이인간의 발전에 위협이 되면 이를 억제하고, 심지어 기술을 인간의 발전이라는 경로 속으로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치적 수단과 사회적 제도가 창안되지 않는 한, 기술의 사용자체를 잠시 중단해야 합니다. 좀 더 분별 있는 세계의 정치가들이라면 현재의 원자력 개발을 중단시킬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우리의 문명이 예술과 기술의 현재 상태가 보여 주는 분열작용을 더 이상 강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난민들‘을 구제하고 치료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술에 다시금, 비인격적인 기술에 의해 완전히 고갈된 생명력과 에너지를 채워 주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술 작품은 단순히 주의를 끌거나 충격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사람들을 오래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매력적이어야 하고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의미를 지녀야 합니다. 그 의미는 숫자처럼 너무나 명백하거나 확실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소 모호하고 신비스러워야 합니다. 예술 작품은 관객이나 청중에게도 불명확한 종류의 반응을 통해 창조적인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합니다

예술 감상자로 하여금 감상자의 숨겨진 내면을 흔들고, 예술가의 비밀을 읽게 하여 그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유사한 비밀을 의식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예술은 그 최소한의 특성도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처녀가 처음으로 만난 연인을 통해 숨겨 왔던 동경과 열정을 자각하게 되거나, ‘청소년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법‘이라는 제목의 어리석은 책자에 나오는 생식기의 형태나 위치에 대한 메마른 지식에 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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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현대소설의 아버지다. 이공아버지는 고마운 존재면서도 흠이 많은 아버지다. 이광수는 전 · 근대에 머물러있던 서사문학의 내적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수혈하면서 비로소 한국어가 자아와 세계를 동시에 포획하는 현대소설에 적합한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근대문학의 맹아들은 이광수에게 와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그것은 그대로 한국현대 서사의 장이 되었다. 이 장강에 기대 한국의 서사문학은 꽃을 피웠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 서사문학이 발아하는 기점이자 여명의 외침이고 아울러 무시무시한 빅뱅이다. 이광수라는 빅뱅을 겪지 않았다면 한국 서사문학의 밤하늘을찬연하게 수놓는 성좌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잘 빚은 항아리" 그 자체보다 그것의 용도를 더 궁구한 사람이다. 어떤 근대인보다 문학의 가능성을 일찍이 엿보았지만, 문학에 흘려보낸 수액은 턱없이 부족하고, 문학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물고 놓지 않는 야수의 열정이 부재했다. 그래서 그가 일군 심미적 이성의 골밀도는 성기고 문학의 골격은 취약했다. 그렇기에 그의문학은 권력의 욕망이 이글대며 타오르는 현실이라는 지옥을 통과하지 못하고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쉽게 녹아버린다. 이광수 문학을 다만 "그만의 문학‘으로 남게하는 것은 이광수의 불행이면서 동시에 현대 한국 서사문학의 근원적 불행이다.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현대 한국문학의 선구자로서 그만큼 많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일제의 ‘일본식 성명강요‘ 정책에 따라 자진하여 카야마 미쓰바꾼 식민지 조선의이름을조숙한 천재이자 걸출한 작가인 이광수는 한국 현대문학의 선구자이자 원죄의 배태자다. 이광수는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김현)다. 그렇지만 한국 문학사는 이광수를 빠뜨리고는 기술할 수 없다. 그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하다. 최남선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데 반해, 이광수는 저 변방의 몰락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세파를 헤쳐나간다. 고아라는 취약하고 어려운 배경 속에서도춘원은 명민한 머리와 피니는 노력으로 한국문학의 선구자,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선다. 그러나 우리 현대문학사가 낳은 이 걸출한 인물은 동시에 변절자 또는 민족반역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비행기 격납고 속처럼 폐쇄적이던 왕조시대의 막바지에 목숨을 받아, 개화파의 계몽주의와 척사파의 민족주의가 한꺼번에 분출되며 혼란의 극치를 이루던 시기에 활동한 식민지 작가의 한계이다. 요즘 들어 친일문학론이 새롭게 논의되며 한국문학의 자랑이자 수치인 이광수의 일제강점기 행보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선각자 이광수를현대문학의 흠 많은 아버지로 갖게 된 것은 우리 현대문학사에 내장된 불행이다.

학원에서 철학과 윤리학, 경성학교와 경신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광수는 1922년 5월, 갑자기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나라가 쇠퇴한 까닭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속성으로 허위와 비사회적 이기심, 무신 겁나 나타, 사회성 결여 등꼽는다. 그러고는 이러한 민족성을 고쳐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친다. 민족성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특히 19세기 들어 제국주의 열강이 자기만족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약소민족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침략세력의 억지 논리와 강면에 맞장구를 친 셈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 민족의 바탕이 ‘선‘ 하므로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도 우수한 민족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한 가닥 희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족성 개조의 방법론 면에서 설득력이 없고, 피침략자인우리는 결국 열등한 민족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단정을 지었기 때문에 이광수의「민족개조론」은 한마디로 패배적 민족주의론이다.

내가 ‘조선신궁‘에 가서 절하고 카야마 미쓰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법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안 말할 필요도 없다.
나의 고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매우 모호한 논리로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데, 그가 뼈저리게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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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어린이는 게임과 말에 있어 상징과 그 가치의 연결에 어떠한 조건성과자의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실험을 통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낱말은 지정된 대상의 자질에의존해야 한다. 어린이의 게임에서는 어떤 것이 아무것이나 다 될 수는 없다.
사물의 실제 성질과 그 상징적 의미가 복잡하게 구조적으로 얽혀 있음이 게임에서 드러난다. 어린이는 낱말을 사물의 특성에 따라 사물과 연관 지으며, 이사물의 특성은 그것이 가진 보편적 구조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우리 실험에 참가한 어린이는 바닥을 유리창(그 위로 걸을 수 없어요!)이라고 부를수 없지만, 게임 과정 중에 그 성질이 바뀐 의자(마치 기차인 것처럼 취급된)는 기차가 될 수 있다. "램프 위에다는 쓸 수가 없고 탁자로는 불을 켤 수가 없어요"
라며 어린이는 ‘탁자‘와 ‘램프‘의 의미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대상의 이름을바꾼다는 것은 그 성질을 바꾸는 것이다.

1-34] 말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어린이가 기호와 그 가치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며 매우 오랫동안 이 관계를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확히 보여 주는 것은 없다. 진전된 실험들 역시 단 한 번의 발견을 통해 명명의기능이 나타나지 않으며, 이 또한 그 자신의 자연적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어린이가 말을 형성할 때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개별의 사물에 각각의 이름이 있다는 발견이 아니라 사물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법, 즉 이름을통해 사물을 조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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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과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제1원인을 알고 싶은 욕구,
즉 어떤 사건이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알고 싶은 욕구에서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듯하다.
현상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은 채 찜찜한 부분을 남겨둔당시의 설명에 대한 불만에서, 또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의심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거부까지 하면서 모든 문제의 뿌리까지파헤치려는 성향에서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왜 우리는 이런 지경으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어떤 존재여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톨스토이의 전반기 일기와 편지에서생생하게 드러나듯이, 이런 ‘지긋지긋한 의문‘ (pro-kiyatye voprosy)에 경험론적 해답을 찾으려는 욕구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톨스토이의 머릿속에서 하나로 녹아들었다. 

톨스토이의 눈에는, "실제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두고 서로 비난하면서 끝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최악의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없지는않았다. "역사의 과정에 명확히 쓰인 지식의 나무에 열린 열매를 맛보지 말라는 명령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무의식적 행위만 열매를 맺고, 역사적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더라도 그는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간과 사건의 상호작용을 기록하는 데 목표를 둔다면서, 이처럼 무한히 복잡한 현상을 일정한 과학적 법칙에 끼어 맞추려는 사람들도 어떤 의도를 지닌사기꾼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맹인들에게 길을 안내하겠다고 나선 맹인 지도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가혹한비판은 이론가의 우두머리, 즉 나폴레옹까지 겨냥한다.
나폴레옹은 사람들을 최면에 걸어, 역사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올바로 대답할 수 있는 남다른 지능과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들을 이해하고 조절했다고 믿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대단한 주장일수록 큰 거짓말이다. 나폴레옹은 이 엄청난 비극에 관련된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경멸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목표는 진실의 발견이었다. 따라서 역사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찾아내서, 역사를 재창조할 수 있어야 했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사회학도 과한이라 자처하지만 거짓말이다. 역사를 설명해줄 진정한 법칙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흔히 사용되던 ‘원인‘ ‘사건‘ ‘시대정신‘ 등과 같은 개념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런 개념은 무지를 감추려는 얄곽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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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보니 본문은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나 안에 있는 여러 가지그림이 일본이나 중국 책과는 매우 다른 맛이 있었으며 정교한 그림을보고 있노라니 눈앞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간 책을 빌려 주야를 가리지 않고 그림을 베껴 요시오가 체류하는 동안 작업을 마칠 수있었으나, 때로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작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에도는 난학이 탄생한 요람이 되었다. ‘해부고 부르던 것을 새롭게 ‘해체‘라고 번역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없이 ‘난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일본 전체에서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지금 유행하고 있는 난학의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정도 전에 외과법이 외국에서 전해졌으나 의서를 직접 번역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더군다우리가 의도의 근본을 이루는 신체 내부 모습을 처음으로 번역한 것은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으니 하늘의 뜻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오색실이 어우러진 모습은 아름답지만 나는 빨간색이나 노란색처럼한가지 색을 고르고 다른 색은 모두 버린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때 생각한 것은 백제의 왕인 133 오진천황134 때 처음으로 한자서적을 가지고 온 이래 대대로 천황은 학생들을 중국에 보내 중국 책을 배우게 했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중국에 뒤지지 않을만큼 한학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열대의 일본》은 머리로만 쓴 글이 아니다. 일본, 네덜란드, 그리고 두나라가 접속했던 열대 동남아시아를 그야말로 몸으로 직접 다니면서 조사하고 탐구하며 쓴 글이다. 데지마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고 레이덴과 암스테르담을 포함하여 유럽 곳곳의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을 탐방하고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 졸서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는 이런 지적 작업의 첫 결과물이다. 이 책은 루브르미술관과 에펠탑의 파리가 아니라 식물원과 자연사박물관의 파리를 부각시키면서 근대 일본의 태동이 유럽 박물학의 영향을 받은 데지마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독자들이 이 책을 먼저 읽게 되면 《열대의 일본>이 더욱 명료하게 다가올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무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에 상관의 설치 장소도 이런 맥락에서 선했다. 다시 말해 막부는 일찌감치 ‘대항해시대‘를 열어갔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 무역 시장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예의주시하면서 주인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도모할 수 있었다. 주인선 무역을 통한 일본의 수출품과 수입품은 교역의 대상 지역 또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랐지만 대체로 주요 수출품은은 동, 철, 유황, 도자기였다. 수입품은 중국에서 생사, 사탕, 도자기,
학종 서화, 서적을, 동남아시아에서는 향신료, 사탕, 약종, 황견소목을 각각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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