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알료샤 카라마조프는 세상의 부당함에 분노하지 않는다.
세상사의 정당함을 외치는 사람들의 논리보다 더 큰 논리가 있음을알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빛이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누가 폭우가 흘러가는 골짜기와 번개가 다니는 길을 만들었느냐?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내렸느냐? 또 누가 수탉에게 슬기를 주었느냐?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응답하여라. 너 자신을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의 문제는 자기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겼다‘는 데 있다. 그는 정
"말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잘못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
물론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 당연하지 내세울 일은 아니다. 그러면 됐지, 그랬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보상은커녕 고통만 주는신의 행위가 부당하다며 심판하려 들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지혜와 판단을 신의 판단 위에 놓으려는 교만한 일이라서 신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 되어 신은 위와 같이 노여워한 것이다.

사탄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욥의 마음에 처음부터 이미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선악을 인식한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자기 한계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한계 밖, 심지어 다른 사람의 다른 인식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면서도마치 신처럼 자기 판결을 모든 일에 적용하려는 태도는 엄청난 교만과 오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간은 사과를 따서 먹은 뒤 선과 악을 알게 되어 신처럼 되었지.
지금도 계속 그것을 먹고 있어.

신의 질타를 받은 욥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생각하기에 또 남이 보기에도 잘못이 없을지언정 그것을 내세우는일은 자기 한계 안에 갇히면서 동시에 그 한계가 전부라고 착각하는일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그런 착각을 정의로 생각하는 교만에 문제가 있다는 점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일이니까

만일 그런 태도가 굳어지면 마치 신과 같이 직접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신론자가 그런 것인데, 그렇게 발전하면 악행마저 자신이 합리화해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자신만이 옳고 타인을 자기 판단 아래 두려고 하는 그런 무서운 타인 파괴가 어찌 보면 욥의생각과 같이 하찮은 일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반 카라마조프가 혼란스러워했던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유신론자, 특정 종교의 예배당에 열심히 다녀야만 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유신론자는 자기보다 더 큰 힘과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하는 경외심을 가지고 있어 항상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고 반성하면서 겸허해진다. 

반면, 무신론자는 그렇게 더 큰 힘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전혀 위축되지 않아 어떠한 일도가능하다. 자신을 평가하거나 처벌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여기니까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살을 포함한 살인까지도 가능하다.
숨을 끊는 신체적 살인뿐 아니라, 무신론자는 늘 정신적으로 타인을살해한다. 자기 판단에 타인들 모두를 종속시키니까 타인의 생각은 그 앞에서 죽는다

우리는 흔히 광신적인 행태를 신앙심이 깊어서 그렇다고 말하기쉽다. 그러나 사실 광신은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광신은 자신의 종교활동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서 도를 넘어간 상태다. 자신의 신앙 행위를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대단히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다. 

그것은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일종의 무신론 상태에이른다. 배타와 독단 그리고 집착은 종교가 가장 경계하는 자세인데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광신자들이 자주 나온다. <성경>에서는 유일한구원의 길이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자신의 방식만이 유일하다고 잘못 해석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각종 종파들이 파생하고 있다. 크게 보면, 그리스도교는 정교와가톨릭으로 나뉘고, 가톨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으며, 개신교 안에서도 장로파니 침례파니 성결파니 하는 수십 개의 파로 분할되어,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같은 그리스도를 섬기면서도 서로 가짜라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서로 죽이는 전쟁도 불사했던 것을 역사는 말해 준다.

세계 어디서나 광신에서 비롯된 이단적인 행위가 있듯이 러시아에서도 그리스도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대로 믿는다는 분파들이 여럿 나왔다. 명칭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그 행태를 알 수 있는 삭발파,
채찍파, 거세파가 있었으며, 재밌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에 들기위해서는 사순절 기간에 우유만 마셔야 한다는 우유파도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광신과 신비주의적인 태도는 배타와 독단이 바탕에 깔린무신론의 역설적인 표출이다.

자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희망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아주 다양한 제도와 굴레들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기록이자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누구나 신분 제도의 속밖에서 벗어나 이론상으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 자유에는 투쟁과 쟁취의 뜻이 따라붙었다. 주체가 되어 직접 나서서 무엇을 하는 것이 자유로 인식되면서 더불어 책임이라는 꼬리표도덧붙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자유가 가장 소중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근대에 형성된 자유의 뜻에 얽매이지 말고, 우리 한번자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쉽게 알기 위해서, 교육받은 초중등 교과서에 나오는 자유에 관한 설명에서 벗어나 그냥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랫동안 자유는 어떤 뜻이었을까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자유롭다는뜻은 무엇일까? 아니 그냥 자유로우면 어떠한 상태인가를 생각하면더 금방 알 수 있겠다.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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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슬픈 처지를 말하다 말고 하나밖에 없는 나의 당숙은 목이 메인다"
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물기가 내뺐다. 그는 물기 머금은 눈을 들어 색름별 받는 푸울가의 벌거벗은 몸들을 보더니, 우리 큰애는 방학이 되어도 귀국4 생각을 못 한다고 말했다. 다음 학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이 시간에도 잘 제대로 못 자며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하층 유색인종 틈에 섞여 땀 뻘뻘 흘릴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동생의 친구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웃었을것이다. 그녀들은 나라 밖 남의 경험에 대해 결코 호들갑 떨며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둘은, 국적 분명하지 않은 젊은이와 알몸으로 잠자며 어느순간에는 땀 뻘뻘 홀릴테지 생각했을 것이다. 당숙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들은 소문이 안 좋았다. 스스로 가난뱅이라는 말을 썼지만 당숙도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할 것이 세상에 가득한 0.01 또는 0, 001 퍼센트를 보며 그는 불행해했다.

시간 여행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남이 철을 쓸 때 우리는 동을 썼다. 옛싸움터에 가보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옛날 우리 어른들이 쓴청동제 대포의 포탄은 바로 포대 밑 바다에 떨어졌는데, 철선에 철대포를 싣고온 파란 눈의 서양 병사들이 쓴 대포알은 그보다 훨씬 먼 곳에서 하늘을 질러 날아와 우리 어른들의 포대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우리는 계산을 할 줄 몰랐다 나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소년기와 청년기 일부를 겉으로는 온화하고 지혜가 많아 보였던 할아버지, 그러나 내심으로는 권력에 대한 한없는 욕망 때문에그 자신은 물론 추종자들의 장기간에 걸친 죄의 무게에 눌려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집권 시기에 보냈다.

역사 속의 눈물 얼룩을 들여다보아도 13, 14세기 눈물과 19, 20세기 눈물의 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다. 몇 세기라는 시간상의 긴 거리가 있는데도 눈물의 성질과 얼룩 모양은 비슷할 뿐이다. 이땅에서 살다 돌아간 어른들은 눈물로자신을 표현해 왔다. 그러면서 왜 눈물로 ‘각성‘ 할 수는 없었을까?
밝은 이야기를 담아내딘 텔레비젼이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정말 큰봇물 터뜨려 만든 ‘눈물‘에 빠져 허위적거려야 했던 1983 년에도 나는 내내이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엇이 우리의 각성을 방해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무엇은, 앞으로도 우리의 각성을 방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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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정은 그 시작에서는 너무나도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예술이 좋은 것이라면 모든 사람에게도좋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림과 조각이 달리 표현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지각, 흥미를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면, 왜 모든 종류의 인쇄가 동일한 임무, 즉 사람들이 시민적이고 종교적인 공공건물에서 습관적으로 본 집단적 예술의 기능을 어느 정도 보충하는임무를 수행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공적 예술의 높고 고상한 수준에 이르는 소수의 예술 형식이 아니라고 해도, 왜 실내화를 신고서난롯가에 앉아 쉬는 곳에 알맞은 덜 과장된 종류의 미적 감응을 위한 장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까? 어떤 시대에는 타나그라 인형이또 어떤 시대에는 목판화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다면, 그 사이 이 엄청난 발전을 심히 왜곡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기계공정 그 자체에 존재했음은 19세기 이전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던 하나의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런 경향에 따라 예술과 기술, 상징과 기능은 지금 현대 건축의가장 우수한 작품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로 생기고 있는 한, 그토록 많은 붕괴의 징후를보이고 있는 우리 문명이, 아무런 목적 없는 권력의 미친 듯한 확대를 실제로 멈출 수 있고, 지금의 적대적이고 분열적인 경향을 효율적인 통합으로 이끄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즉 국제연합 사무국 건물 같은 후퇴는, 모든 장소의 모든 건물 중에서도 그런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마지막 강연에서 저는 예술과 기술 사이만이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에서 분열된 모든 측면 사이에서 통합을 이루기 위한 더욱더 일반적인 조건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보편적이지 않다면, 예술도 기술도 오래번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더 냉정하고 강제적인 형식 속에서의 기계가 더욱더 지배한다는 점이 아니라, 삶의 재생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테마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를 위한 첫걸음은 주도권을 쥐고, 삶을 위한 우리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우리 자신을 판에 박힌 일상생활로부터 충분하게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사물을장악해야 합니다. 그 규모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예술이 한쪽으로 치우친 기술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창조나 재창조로서의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의 상태와 구조 속에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멈추어 서서, 침묵하고,
우리의 눈을 닫고서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단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며, 우리 자신의 충동과 감정에 반응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감정과 정서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즉 나락으로 떨어지는 허무나 잔혹한 악몽 대신, 우리 내면의 삶은 자기 수양에 개방적일 수있고, 개인적 행위와 예술에서 타인과의 더욱 결실 있고 사랑스러운관계를 맺게 하며, 예술의 상징을 통해 타인의 숨겨진 내면의 물길을우리 자신에게 흐르도록 할 것입니다. 

풍경과 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수련과 함께 우리는 조만간 우리 시대의 속도와 리듬을 조정하고, 우리가 맞부딪히는 자극의 양을 통제하며, 우리의 집중을 조정하여, 우리가 하는 일이 기계의 외래적인 목적과 가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목적과 가치를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방식이 우리 사회의 방식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모욕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전진은 늦을 수밖에 없고, 수없이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보잘것없는 항의와 반대도 인간 정신의 주도권 회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는 부적합한 것, 하찮은 것, 지루한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의미 있는 좋은것들을 새로운 활기로 긍정하게 하는 더욱 적극적인 선택을 할 수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좋은 것들이 오로지 기계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때에도, 그것들은 우리가 명령하는우리의 것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숙고하고 향유하는 우리의 것이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재생이라는 큰 짐이 우리들 위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문화 속에서 재생을 낳을 힘을 이해하고 우리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강제할 계획과 이상을 요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마취되고, 멍청하고, 비겁할 정도로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는 대신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현재상태를 각성한다면, 예술과 기술이 지금 우리의 손에 쥐어 준 모든자원들에 힘입어, 우리의 삶을 새로운 모양으로 고쳐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아마도 하나로 결합된세계를 위한 초석을 놓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 적대중인 종족들, 국민들, 인민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속에서 마찬가지로 분쟁과 갈등 중에 있는 충동들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꿈은 다시금 쾌적하고 합리적 원칙으로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예술은 형식과 구조와 의미를 되찾게 되고, 기계는 그것이 아무리 고도로 조직됐다고 해도 삶의 요구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블레이크의 잠언을 자랑스럽게 뒤집어 이렇게 말할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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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술을 위한 것이라면 광적인 범죄행위도 용인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맙다백성수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K의 예술관은 바로 작가 김동인의 예술관에서 발현된 것이다. 김동인의 이러한 가치관을 역으로 거슬러 오르면 꼭대기에는 이광수가 자리 잡고 있다. 

 즉, 김동인의 온 생애에 걸친 문학적 지표는 도덕성에 입각한 이광수의 교화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배따라기」 등에서 보인 낭만적 예술 지향성,
감자에 나타난 비윤리성, 그리고 광염소나타」, 「광화사」 등의 탐미주의 경향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 자체를 파헤치기보다 지나치게 이광수 문학과 대립관계를 드러내는 쪽으로 치우친 나머지 일쑤 현실성을 잃고 팬다. 말하자면 김동인 또한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또 이광수가 신문에 연재한 역사소설에 대해 비난하던 그자신도 생활고는 어쩔 수 없었는지, 1931년 대원군의 삶을 그린 젊은 그들」등을기점으로 역사물, 야담류 같은 흥미 위주의 소설을 써낸다. 이로 말미암아 김동인은 역사의식이 없는 감상적이고 권선징악적 우국지사의 사관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김동인은 예술은 개인 전체 라는 식으로 예술 지상주의에 젖어서 뛰어난 문학가는수행할 수 있을인생을 손바닥 위의 인형처럼 조종하여 일종의 신인합일는 우월한 존재로 인식한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이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안되는 작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다. 물론 이와 같은 예술가 우월주의는 섣부른 선민의식의 발로에 지나지 않겠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개인적 자부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창조>를 비롯하여 《영대> 등 당대의 정전은 이루더 무예지에서 늘 주역으로 활동한다. 

일생에 걸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 이상을 발표할 뿐 아니라, 각 작품 속에서 낭만주의 · 자연주의 · 탐미주의 · 사실주의 같은 다양한 경향을 시도한 것도 남다르다. 

 당시 아직 이광수의 무정이 선보인 ‘~이다 체에 머물던 초기의 시제에서 훌쩍 뛰어넘어 과거 시제인였다‘ 체의 도입으로 혁신을 꾀한 작가 또한 김동인이다.

이 밖에 삼인칭 서술자의 시점을 사용한 객관성 확립,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과감한 생략을 통한 박진감있는 사건 진행, 입체적인 성격의 인물 창조, 구성의 치밀함 등 한 차원 높은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김동인이 우리 현대 문학사에 남긴 큰 공적임이 틀림없다.

아울러 이 작품은 식민지 사회에서 한인간의 삶과 도덕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한 구성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리얼리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난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일기 시작한 신경향 소설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지만, 작가는 같은소재를 가지고서도 도식적이고 딱딱한 경향 소설류와 달리 작품 속에서 변화와 재미를 연출한다. 여러 측면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 단편 소설 「감자」는 김동인의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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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 전반은 커다란 재편집 시대를 맞이하고있습니다. 지금 은행은 예전의 은행이 아니고 텔레비전과 컴퓨터의 기능이 점차 비슷해지면서 학교에서도 종합 학습을 실시해야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대형 슈퍼마켓과 편의점이 구석구석에 생겼고 어린이들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며 인터넷 세상이 된 오늘날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집력이 더욱 필요해지는 시대입니다.

법의 형태, 운동 규칙의 형태, 음악의 형태, 텔레비전 뉴스의 형태, 학교 교육의 형태, 과학 법칙의 형태 등 우리들은 편집 세상에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를 우리들에게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름의 방법을 알아내야 합니다.

1. 편집은 조합이다.
2. 편집은 연상이다.
3. 편집은 모험이다.

편집공학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인식도 편집 대상이며, 나라나조직, 스포츠나 음악도 편집 대상이다. 놀이나 게임, 스포츠도 편집이며, 법이나 계약, 외교도 편집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말과 기억의 발생에서부터 교환 프로세스를 거쳐 조직화와 구조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편집에 포함되며 편집공학의 다양한 연구 대상이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편집의 영역은 매우 넓은데, 편집을 한마디로 말하자면커뮤니케이션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1. 편집은
‘문화‘와 ‘문맥‘을 중요하게 여긴다.
2. 편집은항상 ‘정보의 생김새‘에 주목한다.
3. 편집은 일상 대화처럼 ‘상호 공명相互共鳴 한다.

문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스토리가 정해진 소설과 영화에만 문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에도 문맥이 있으며, 연애에도 문맥이 있다. 요리도 요리법recipe이라는 문맥을 지키지 않으면 엉뚱한 맛이 나게 된다. 레시피는 맛의 문맥을 만들기 위한 편집술이다. 비즈니스도 문맥 하나 틀리면제대로 성공시킬 수 없다. 비즈니스 노하우는 바로 비즈니스의 문맥을 만들기 위한 편집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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