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는 하나의 아이콘이며, 그럴 만한 사람이다. 모든 일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은거의 없다. 

그는 한 세기에 걸친 혁명을 종식시켰고 로마공화정을 무너뜨렸으며, 공화정을 자신이 초대 황제가 된 제국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열아홉 살에 로마 최고의 정치 행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그런 일을,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을까?

그는 어떻게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력이 넘치는 한 쌍인 안토니우스와클레오파트라의 반대를 극복했을까? 

 어떻게 유약한 소년은 성공적인 군벌이 되고, 그 다음 어떻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평화의 증진자 중의 한명으로 변신했을까? 

어떻게 그는 완벽한 2인자, 즉 우두머리의 권력을위협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장군이자 행정가로서 복무하는 파트너를 찾아냈을까? 

어떻게 한 세기동안 이어지는 왕조와 그보다 더 긴 세기 동안에 지속된 제국을 창건했을까?

긴 인생의 말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몇몇 질문들에 대답했다. 로마에 있는 그의 영묘 앞에 세워진 청동 원기둥에 그는 다음의 문장을 포함하는 상세한 내용의 비문을 새기게 했다. 

"국사를 관장할 절대적 권한을 만장일치로 부여받아 내전의 불꽃을 꺼뜨렸을 때, 나는 공화정을 나의 수중에서 원로원과 로마 민중의 뜻에 다시 맡겼다. 이런 봉사 덕분에 나는 원로원의 칙령으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다. 진짜 내막은 무엇일까?

옥타비아누스가 자라는 동안 카이사르는 로마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고, 로마는 자부심이 강한 자치 공화정으로 진화한 상태였다. 로마 민중과엘리트 계층은 민회와 법정, 선출 공직자, 원로원 같은 제도들을 통해서권력을 공유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공화정은 카이사르 같은 정복자 장군과 그를 따르는 수만 명의 충성스러운 병사들 앞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그는 이미 50년에 걸쳐 간헐적인 내란을 겪어온 나라에 내전을촉발시켰다. 이 내전은 다시금 두 세대를 거슬러올라가는 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마 시와 그 제국을 길들일 수 있는 누군가만이 평화와 질서, 안정을가져올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복자이지 건설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해낼 수 있을까?

야망에 불타오르는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영리하고,
매력적이며, 의사소통에 뛰어났으며 잘생겼다. 의지도 굳건했다. 그리고그에게는 아티아가 있었으니, 그녀는 분명히 기회가 날 때마다 카이사르에게 자기 아들에 대한 칭찬을 실컷 늘어놓았을 것이다. 

쉽게 속는 어수룩한 자들이나 이런 이야기를믿겠지만, 카이사르는 대중이 쉽게 속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이런 뜬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골랐을 때에 카이사르는 위대함의 씨앗을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선택이 밖으로 알려지자,
일부 사람들은 열일곱 살짜리가 부정한 술수도 없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 하여금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여기서 부정한 술수란 섹스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나중에 그 소년이 히스파니아에 있을 당시 카이사르와 관계를맺었다고 손가락질했다. 한편으로 이런 이야기는 로마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적에게 수시로 꺼내는 중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옥타비아누스는야심만만한 만큼 잘생기기도 했고, 풍문에 따르면 카이사르도 본인이 십대였을 때에 어느 막강한 연장자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둘 다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열여덟 살에 그는 금욕적 생활이 단단한목소리를 유지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1년간 성생활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처방이 정말로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째진 목소리와는 달리 듣기 좋고 특색 있는 목소리를 자랑했기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정 크나큰 손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인생으로 들어와서 아버지 역할을 하고, 그에게 위대해질 잠재성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각별히 신경써준 사람이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슬픔만이 그의 유일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공포와 분노그리고 복수에 대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은 타격이자기회이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독재관의 상속인이자 이제 가문의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싸워야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중에 자랑스레 배포할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결정적15인 순간이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각상으로 오른손을 뻗으며양부의 영예들을 획득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막 열아홉 살이 되었지만이미 이전 로마 종신 독재관의 권력과 영광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천명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보다 덜한 주장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사람들이 많다.

로마는 적들로 넘쳐났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일시적인 후퇴를 한 뒤에 다시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힘세고 잘생긴안토니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헤라클레스는 책임감 정의와 더불어 용맹의 상징이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보았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자 오랜 지인으로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피살된 독재자의 마땅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결연했다. 그는 명예와 영광을 원했고 그것을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죽음에 애통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를 위해서복수를 할 작정이었다. 아니, 아예 그가 될 작정이었다. 

그는 카이사르가유언장에서 제시한 입양을 최종적으로 정식화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비록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를 것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카이사르라고 불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듯이 그는카이사르를 쉽사리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권력의부적처럼, 그 이름이 이미 수세기에 걸친 무게감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듯이 다루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처음 쓴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이 그녀가 마지막은 아닐 운명이었다.

정치인으로서 키케로의 경력은 희비가 엇갈렸다. 그는 집정관으로 재직할 당시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 와중에 5명의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하는 바람에 나중에 일시적으로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내전 시기에는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다가 카이사르에게 사면과 더불어 자신의 저작에 대한찬사도 받았지만, 권력으로 향하는 문이 닫혔음을 깨달았다. 칩거하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암살자들을 지지했다. 이제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에게 자신이 바로 카이사르가 억누른 자유를 회복할 자라는 것을 설득시켰다.

표면상으로 이것은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같은 또다른 군사 독재자로부터 공화정을 구해내고 싶어했다. 

노인네가 많이 물러진 것일까?
아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패가 위험천만한 도박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의 연장자인 아토니우스가 더 노련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키케로와 옥타비아누스는 전략적으로 동맹을 맺었고, 그 다음 진짜 문제는 누가 먼저 누구를 버리고 최후의 승자가될 것인가였다.

옥타비아누스의 젊음은 장점으로 드러났다. 그는 구체제에 딱히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는 데에 별 거리낌이 없었다.

원로원은 일시적인 우군일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유용했지만 카이사르의 위상을 획득하려는 그의 목표에는 적대적이었다. 안토니우스가 더 좋은 파트너였는데, 그에게는 공화정이라는로마의 헌정체제에 대한 원로원과 같은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 귀환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와 전쟁을 통해서 장애물을 교묘히 헤쳐나갔고 경쟁자들을 한 수 앞질렀으며,
로마 제국의 최강자 3인방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스무 살의나이에 달성했다.

스물네 살에 옥타비아누스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야심은 끝이없었고 지성은 예리했으며, 판단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무한한 근면성을갖추었다. 그의 설득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여느 젊은이들처럼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양부의 피실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그는 괴로움을 전략으로 전환하는 기술에 통달했다. 그리고 전략의 수립이 옥타비아누스의 특기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언제나 한참앞을 내다보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래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선전에 관한 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베스타 처녀들로부터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하면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유언장은안토니우스가 죽을 경우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나란히 묻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담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제국의 권좌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길 심산이라고 주장하며 경쟁자가 반역자라고 규탄했다.

전쟁의 횃불은 꺼졌다. 세계는 더 따분해졌지만 더 평온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수호신 아폴론, 즉 이성의 신이 안토니우스의 수호신 헤라클레스 완력의 상징을 무찌른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 제국의 주인으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정말로 로마다울 것이었다. 악티움 전투는 제국의 무게 중심을 계속 로마에 유지시켰으며, 이런 상황은다음 3세기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전략의 천재였지만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움직였다.
그녀는 로마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을 연달아 유혹하여 그들의 자식을 낳았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뻔했지만 옥타비아누스라는 제대로 된 맞수를만났다.

이제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속주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곳의 파라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것이었던 도시의 명예는 이제 그의 것이었다. 무력으로 그리고 설득의 힘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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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지리와 언어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피할수 없는 요소이다. 어렵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길 권한다. 지명 또한 인명과 더불어 그 언어를 접하는 마중물과 같은 것이기에 새 이름들의 등장을 반가이 맞이함이 어떠할까.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27년째가 되던해에 기원후의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 로마는 제정,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당사자는 극구 부정했지만 모두가 황제라고 생각했던 옥타비아누스는 독재성을 최대한 배제하여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만들어 붙였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 황제라는 뜻의 단어가 되어버린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었으나 민심이 그러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단순히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을 채우거나 카이사르의군사적 업적을 뛰어넘기 위해 게르마니아를 공략한 것은 아니었다. 

어져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이동이 힘든 구조였던 것이다. 국경이 동쪽으로 이동해 엘베강 경계가 되면, 도나우강 경계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 국경선이 수백 km 이상 줄어들게 되고 전력의 이동과 보급이 용이해져 제국의 방어가 훨씬 용이해진다. 전략적 이득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얻는 것이다. 영토는 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았다. 영토 획득은 물론 방어에 있어서도 라인강국경보다 크게 용이한 것은 아니며, 게르마니아에서 얻어지는 세수稅收또한 소요되는 재정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두가지 의견 중 전자를 택했다.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우구스투스의 큰 그림은 초장에 산산조각나고 마는데 바로 토이토부르거발트Teutoburger Wald 전투였다.

로마의 게르마니아 군단이 전멸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벽에 머리를 받으며 오열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의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로마는 게르마니아 수복을 위해, 또 토이토부르거발트 전투의 복수를위해 수차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치지만 결국엔 게르마니아 속주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엘베강이 아닌 라인강이 로마의 국경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그는 로마 입장에서는 특급 배신자였으나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애국자였다.
역사가 타키투스 또한 아르미니우스를 적이지만 군사적으로 훌륭했고 자신의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전사로 평가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왕망은 <송사>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망탁조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먹고 있지만 사실 왕망은 냉정하게 보면 현대의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사람이다.

한 왕실의 외척 왕망은 마지막에 가장 큰 열매를 얻기 위해 끝없이 참고스스로를 위장한 사람이다. 왕방은 가난한 집안에서 제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이익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철저히 대중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만을 하며 야심을 숨겼다. 

부인 또한 부창부수라 할 수 있었는데 그 차림이 검소하여 손님들이 하녀와 구별을 못 할 정도였다.

왕망은 노비를 함부로 죽인 아들에게 자살을 명하는 등 그야말로 대인의표본, 문자를 좀 쓰자면 대의보여주었다. 

대단한 절제력으로 왕망이 얻은 것은 대중의 마음과 관료들의 신망이었다. 천하를 가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재물 따위가 아님을 그는 일찌감치 알았던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욕망의 절제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을 죽이기까지하다니 말이다.

왕망은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상대가 없음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오랜 인내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목표가 지존이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본전 생각에 부귀영화를 누렸을 터인데 끝까지 자신을 눌렀다가 터뜨린 것이다. 최고 자리에 올라선 그는 정사를 농단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했다.

왕망은진시황에 의해 황제의 지위가 생긴 이래 최초로 선양의 형태로 왕위를 찬한 인물이 된다. 네 살짜리 태자에게 왕망은 천명에 따라 자신이 황제가될 수밖에 없음을 찬찬히, 눈물을 흘리며 설명했다고 한다. 인생을 햇수가아닌 달수로 세야 할 대상에게 친절하게도 말이다. 이렇게 왕망에 의해 한이 무너지고 신이 세워지게 된다. AD 8년이었다.

왕망은 여론이라는 것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가진 인물이었던것이다. 그는 여론이 곧 민심이고 민심이 허락해야만 대권이 허락됨을, 그리고 그것을 인력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던 것이다. 

힘이 모자라던 시절은 철저히 명성을 얻기 위해 행동했고, 힘을 얻고 난 뒤에는 재물을 풀어 여론을 조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수십만 명의 백성이자신을 지지하고 자기 뜻대로 청원을 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다. 큰 그림을위한 지난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신은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펼친다.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참았던 탓에 조급해졌던 것일까. 왕망은 민생을 혼란에 빠뜨리고 주변국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외교적 실책을 거듭한다.

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다른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신한포즈가장시 찬탈된 상태였을 뿐이라는 견해와, 단명했지만 분명히 기조를 들은별도의 국가였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는 전한과 후한이 하나의 나라아니면 별도의 나라인가라는 시각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자를 따른다면 신은 나라로 볼 수 없는, 왕망이라는 대역적이 일으킨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고 후자를 따른다면 신은 단명했으나 엄연한 나라인 것이다. 따라서 전한과 후한을 별개의 왕조로 나누는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신은 당당한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신은 곤양대전유수가 지휘한 반란군에 대패하면에서서 급속히 무너진다. 그러나 신을 멸망시킨 것은 유수가 아니다. 즉 후한에의해 신이 멸망한 것이 아니다. AD 23년 유수가 부하로 속해 있던 유현의 군대가 장안에 진입하여 왕망을 살해하면서 신은 15년 만에 사라진다.

유영은 전한의 황제 계보를 말할 때 마지막 황제로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나 실제로 황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 황제가 공석이었던 한 왕조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태자였기에, 왕망은 그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을취했던 것이다. 비록 허수아비이긴 했지만 형식상 황제로 보는 시각 또한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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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바뀐다. 그것도 자주 바뀐다. 그 옛날일어났던 그 사건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옮겨놓은역사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란 ‘어떤 일‘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어떤 일을 기록한 자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건이 있었던 그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그 사건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를 보고 단지 그것을 추정할 뿐이다. 

다만 역사는 오로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에 달린 것이기에 ‘좋은‘ 사람이 해석을 하면
‘좋은‘ 역사가 되고, ‘나쁜 놈‘이 해석을 하면 ‘나쁜‘ 역사가 되며, 무엇인가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이 해석을 하면 역사는 그 의도를 담게 된다.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이 해석을 하면 역사는 그 의도를 담게 된다. 결국 수많은 역사에 관한 문제는 같은 사건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였던 셈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역사의 해석이 달라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거나 유물과 유적 발굴에 따른 정보의 추가가 있다. 그러나 역사 해석의 가장 큰차이는 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관점을 말한다. 사관에 따라 하나의 사건이 전혀 다른 일처럼, 혹은 전혀 다른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사관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거나 특정한 목적이 있는 학자에게는 새로운 유물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관의 차이가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는 불변이 아닌 바뀔 수 있는 것임을, 또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시사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일 때에만 해당된다. 그 가치 판단은 후세에 미친영향에 따라 무언의 합의에 의해서 좌우된다.

시사에서 역사가 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될지는 모르지만, 현재의사건이 후세의 사가들에게 해석의 혼선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기록을 남기는 사람의 중립성과 정확함이 필요하다. 

기록을 남기는 사람의 중립성과 정확함이 필요하다. 현대는 과거와 달리 과학기술의발달로 문자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기에 더 오랜 후대까지 더 자세히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의 기본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록자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과거 경험들 속에서 역사의 왜곡이 과학의 발달과는 상관이 없음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결국 역사는 ‘사람‘이 한 일을 ‘사람‘이 쓴 것이고 사람‘에 달린 일이다. 

중언부언을 거듭하고 있지만 한 번 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들자면 역사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역사가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은 신화와 종교가 맡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증거가 없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신화와 종교라는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공을 넘기기 전까지는 지식의 근원을 역사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시작을 지식의시작으로 받아들여도 크게 무리가 없다. 

아마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겠지만현재까지 생명의 기원이나 무에서 유의 탄생 등은 종교와 신화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상상의 세계에서 어느 순간 역사의 세계로 생각의 바통이 넘어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인류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지식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기록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역사시대 이전을 선사시대라고 한다. 시가생기기 이전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의 수단인 문자의 탄생이곧 역사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물론 문자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의 문제가 있지만 학계에서는 그림에서 문자로 발전해가는 긴 단계의 어느 지점에서 ‘이 정도면 문자‘라는 합의를 본 상태이다

수메르의 쐐기문자, 이집트의 상형문자, 중국의 갑골문자 등이 동굴벽화와 같은 그림에서 발전을 거듭한 어느 시점의 상태인 것이다. 아마 또 다른 발견으로 이 합의가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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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1908~?)은 모더니즘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지만, 특히 이론적으로 관심을 두고 파고든 분야는 이미지름과 주지주의다. 더러 그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기도 한다. 

김기림은 1935년 <조선일보>에 투고한 「오전의 시론」과 《신동아》에 게재한 ‘포에지와 모더니티」, 「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주의적 태도 등을 통해 기술 과학문명의 현저한 발달 속에서도 여전히 감상적 낭만시나 읊조리는 센티멘탈리즘은 물론, 정치·사상성에 편중된 내용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그는 현대문명의 발달에 따라 문학도 새로운 양식 실험으로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주지주의다. 

김기림은 "실로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논의의 의견이 거의 선인들에 의하여 말해졌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논설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방법으로 지성을 강조하고 표현 면에서 형식이나 언어의 기교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이론을 펼친다.

구인회가 추구하는 방향과 수법은 회원가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해 "주지주의, 이미지금,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신감각과등 잡다한 경향을 포괄한다. 구인회는 이런 여러 경향에 그치지 않고 때로 전통적 소재와 모더니즘 기법을 접목시켜 갖가지 형태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펼치며 모더니즘 문학의 경계를 한껏 넓히는 한편, 어찌 보면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기도한다.

 1936년에 들어 김기림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이라도 하려는듯 장시집 기상도를 펴낸다. 「기상도」는 파시즘의 확산과 함께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 속에서 짚어낸 현대 문명의 징후를 태풍 전의 일기 예보에 빗대어 풀어놓은 작품이다. 장시 기상도」에서 김기림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를 충돌시켜 사전적 언어와 다르게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감각과 기교로 과연 모더니즘의가수다운 면모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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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개인적 이득이다. 몇몇경우 그것은 사기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천성적으로 은밀하다.) 다른 경우에서 그것은 정직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천성적으로 순진하다.) 

그러나 어떠한 의도였든 상관없이, 결과는 똑같다. 당신은 사실이 아닌 것을 믿도록 기만당하고 있다. 당신은 설득당하여 결국 현실을 무시하게 되고 현실 대신 거짓을 받아들인다.

다른 이들에게 기만당하는 것 외에 자기기만이란 것도 있다. 이런 자기 파괴적 행동의 결과는 재앙에 가깝다. 정신병에서부터 재정적 파탄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상당한 재정적 결과를 성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재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반드시 자신만의논리와 믿음을 주의 깊게 점검하는 습관을 길러야만 한다. 즉, 자기망상이라는 양념을 너무 많이 뿌린 식사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것망상은 삶의 모든 분야에 만연하고 있다. 예외는 없다. 광고 사업을생각해 보라. 이것은 최고의 망상적 세계이다. 

오래된 마케팅 격언이 있다. "당신이 그럭저럭 잘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팔아라. 당신이 부자 되길 원한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팔아라." 

.‘ 어떻게? 간단하다. 단지 소비자들에게 마치 현실 같은 그 무엇을하라고 권유하면 된다. "말보로 세계로 오세요." 말보로 세계, 이 말을 듣게되면 우리는 그것이 지상낙원과 마술세계 사이 중간에 존재하는 그런 곳이아닌가 하고 추측하게 된다. 일단 당신이 빠져들게 되면 은유적 표현이다.)로버트 레드포드처럼, 주름진 부드러운 가죽 재킷을 입고 카우보이모자를 쓴채 불붙은 시가를 한 모금 빨면서 아름다운 말 위에 앉아 있고 싶은 느낌이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나게 되는 첫 단계는 물론, 말보로 담배 한 팩을사는 것이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자,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런 광고에 기만당할 정도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그럼 질문을 해 보겠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담배 회사들은 다른 수많은 광고회사를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똑같은 광고를 수년 이상 지속해오고 있는가? 확실히 그것은 그 광고의 결과가 너무도 형편없어서기업들이 막 파산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망상의 세계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너무도 기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비자들을 망상 속에 살게 함으로써 회사 제품을 계속 구매하도록하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광고 대행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면, 당신은 이미증명된 망상의 규칙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더 좋게 보이기를 원하고, 더 좋은 냄새를 풍기기를 원하고, 더좋은 느낌을 가지기를 원하고, 더 관능적이기를 원하고, 좀 덜 일하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기를 원하고, 더 많이 놀기를 원한다. 

진실을 말하자면,맥주는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 담배도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확실히, 3초 만에 시속 0마일에서 150마일로 달릴 수 있는 그런 픽업트럭도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광고업자들은, 이렇게 전혀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광고업자들은 영리하게도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띤 물건들을 판다. 만약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팔려고 노력해 보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결국 파산할 것이다.

결국, 당신의 성공은 현실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는 습관을 기르는
‘당신의 헌신‘에 달려 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당신은 망상의 희생물이 되는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의도는 그를 조롱하거나 그를 응징하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지금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에 대한 공포로 인해 생기는 자기망상‘이란 문제에 대해 방심하지 않고 늘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인간이란 원래 진실에 귀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을 외면하는 쪽을 택함으로서 우리스스로를 기만하려 한다. 심지어 그러한 기만이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단지 지연만 시켜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이런 행동은 장기적으로 처참한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불로소득의 욕망은 잘 조절되지 않는다면 더 심각한 자기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원래 그토록 현명했던 인류를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킬수 있다. 

따라서 당신은 그 어떤 금전적 합의를 맺기 전에 당신 개인의 전제를 두 번 체크하는 신중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또한 당신이, 마음속 깊은곳에 존재하는 불로소득의 욕망에 의해 이끌린 것은 아닌지 반드시 확인해보는 습관도 길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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