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지리와 언어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피할수 없는 요소이다. 어렵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길 권한다. 지명 또한 인명과 더불어 그 언어를 접하는 마중물과 같은 것이기에 새 이름들의 등장을 반가이 맞이함이 어떠할까.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27년째가 되던해에 기원후의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 로마는 제정,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당사자는 극구 부정했지만 모두가 황제라고 생각했던 옥타비아누스는 독재성을 최대한 배제하여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만들어 붙였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 황제라는 뜻의 단어가 되어버린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었으나 민심이 그러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단순히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을 채우거나 카이사르의군사적 업적을 뛰어넘기 위해 게르마니아를 공략한 것은 아니었다. 

어져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이동이 힘든 구조였던 것이다. 국경이 동쪽으로 이동해 엘베강 경계가 되면, 도나우강 경계와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 국경선이 수백 km 이상 줄어들게 되고 전력의 이동과 보급이 용이해져 제국의 방어가 훨씬 용이해진다. 전략적 이득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얻는 것이다. 영토는 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았다. 영토 획득은 물론 방어에 있어서도 라인강국경보다 크게 용이한 것은 아니며, 게르마니아에서 얻어지는 세수稅收또한 소요되는 재정에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두가지 의견 중 전자를 택했다.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우구스투스의 큰 그림은 초장에 산산조각나고 마는데 바로 토이토부르거발트Teutoburger Wald 전투였다.

로마의 게르마니아 군단이 전멸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벽에 머리를 받으며 오열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의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로마는 게르마니아 수복을 위해, 또 토이토부르거발트 전투의 복수를위해 수차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치지만 결국엔 게르마니아 속주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엘베강이 아닌 라인강이 로마의 국경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엇갈린다. 그는 로마 입장에서는 특급 배신자였으나 게르만족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애국자였다.
역사가 타키투스 또한 아르미니우스를 적이지만 군사적으로 훌륭했고 자신의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전사로 평가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왕망은 <송사>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망탁조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먹고 있지만 사실 왕망은 냉정하게 보면 현대의 자기계발서에 나올 법한 사람이다.

한 왕실의 외척 왕망은 마지막에 가장 큰 열매를 얻기 위해 끝없이 참고스스로를 위장한 사람이다. 왕방은 가난한 집안에서 제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이익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철저히 대중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행동만을 하며 야심을 숨겼다. 

부인 또한 부창부수라 할 수 있었는데 그 차림이 검소하여 손님들이 하녀와 구별을 못 할 정도였다.

왕망은 노비를 함부로 죽인 아들에게 자살을 명하는 등 그야말로 대인의표본, 문자를 좀 쓰자면 대의보여주었다. 

대단한 절제력으로 왕망이 얻은 것은 대중의 마음과 관료들의 신망이었다. 천하를 가지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재물 따위가 아님을 그는 일찌감치 알았던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욕망의 절제라 할 수 있겠다. 자식을 죽이기까지하다니 말이다.

왕망은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상대가 없음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오랜 인내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목표가 지존이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본전 생각에 부귀영화를 누렸을 터인데 끝까지 자신을 눌렀다가 터뜨린 것이다. 최고 자리에 올라선 그는 정사를 농단했음은 물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했다.

왕망은진시황에 의해 황제의 지위가 생긴 이래 최초로 선양의 형태로 왕위를 찬한 인물이 된다. 네 살짜리 태자에게 왕망은 천명에 따라 자신이 황제가될 수밖에 없음을 찬찬히, 눈물을 흘리며 설명했다고 한다. 인생을 햇수가아닌 달수로 세야 할 대상에게 친절하게도 말이다. 이렇게 왕망에 의해 한이 무너지고 신이 세워지게 된다. AD 8년이었다.

왕망은 여론이라는 것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가진 인물이었던것이다. 그는 여론이 곧 민심이고 민심이 허락해야만 대권이 허락됨을, 그리고 그것을 인력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던 것이다. 

힘이 모자라던 시절은 철저히 명성을 얻기 위해 행동했고, 힘을 얻고 난 뒤에는 재물을 풀어 여론을 조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수십만 명의 백성이자신을 지지하고 자기 뜻대로 청원을 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다. 큰 그림을위한 지난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워진 신은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펼친다.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참았던 탓에 조급해졌던 것일까. 왕망은 민생을 혼란에 빠뜨리고 주변국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외교적 실책을 거듭한다.

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다른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신한포즈가장시 찬탈된 상태였을 뿐이라는 견해와, 단명했지만 분명히 기조를 들은별도의 국가였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는 전한과 후한이 하나의 나라아니면 별도의 나라인가라는 시각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자를 따른다면 신은 나라로 볼 수 없는, 왕망이라는 대역적이 일으킨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고 후자를 따른다면 신은 단명했으나 엄연한 나라인 것이다. 따라서 전한과 후한을 별개의 왕조로 나누는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신은 당당한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신은 곤양대전유수가 지휘한 반란군에 대패하면에서서 급속히 무너진다. 그러나 신을 멸망시킨 것은 유수가 아니다. 즉 후한에의해 신이 멸망한 것이 아니다. AD 23년 유수가 부하로 속해 있던 유현의 군대가 장안에 진입하여 왕망을 살해하면서 신은 15년 만에 사라진다.

유영은 전한의 황제 계보를 말할 때 마지막 황제로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나 실제로 황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 황제가 공석이었던 한 왕조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태자였기에, 왕망은 그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을취했던 것이다. 비록 허수아비이긴 했지만 형식상 황제로 보는 시각 또한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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