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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저승 최후의 날 1~3 - 전3권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아란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3월
평점 :
생전에 듣던 것만큼 가혹하지 않아요
만화, 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겁먹지 마세요
이 책은 어이없게 시작합니다. 친구인 과학자 두 명이 변광성 알두스를 보려고 차를 세웠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요. 어느새 저승에 도착한 두 친구가 만나게 되는 저승 안내문의 글귀가 이렇습니다. 생각만큼 가혹하지 않다, 겁먹지 말아라...
픽 웃음이 나오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저는 웹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쉽게 쓰인 글이라고요.
최근 몇 년 새 우리나라에서 작품성도 뛰어나고 흥행에도 성공한 SF 소설이 많이 나오는 데 웹소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듣기는 했어도, 웹소설이나 웹툰은 가벼운 '무엇'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이 책은 그러한 저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버린 책입니다.
전 3권, 1500쪽에 달하는 책을 읽어나가며 '대체 뭐지, 이 책의 장르는?'하고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천문학과 공학을 토대로 하니 SF가 맞고, 갖가지 저승을 세밀하게 그린 것을 보면 판타지이기도 하고, 철학책인가 신앙을 그린 책인가 싶기도 하고요. 최후에 남은 군인, 과학자, 저승 관원과 망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이리도 합리적이고 믿음직하다니, 인간성을 고찰하는 책인가 싶기도 하더라고요.
아마 작가와 출판사에서도 저와 같은 독자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걸까요? 3권 말미에 붙어 있는 작가와 프로듀서의 말에서 이 책의 탄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으며, 책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이 다소나마 해소되었어요.

이 책을 쓰신 시아란님은 공학을 전공하셨네요. 이제는 과학을 전공하신 분도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군요. 공모된 단편 소설을 보고 장편을 써달라고 주문하신 출판사 '안전가옥'의 안목도 훌륭하고, 단편을 1500쪽짜리 대작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역량도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아직 여러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은 작가인데 이런 글을 쓰다니, 다음에는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지 정말 기대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소개해 보자면...
특히 놀랍고 매혹적이었던 것은 클리셰라곤 볼 수 없었던 세계관과 잘 짜인 얼개였어요. 최근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예리한 감성, 따뜻한 인간애가 가득한 수준 높은 SF 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딱 하나 세계관이 아쉬웠거든요, 저는. 이제는 게임의 세계관이 더 훌륭한 건가 하고 생각하곤 했었어요. 이 책으로 인해 아직도 상상해 낼 수 있는 멋진 배경이 많구나 하고 기뻤습니다.^^
저승이 죄를 지은 사람을 무섭게 벌하는 곳이 아니라 교화를 목적으로 한다거나, 저승사자가 기독교인을 만나 협상한다는 설정 또한 재미있으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저승끼리 교류한다거나,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라져 저승이 없어졌다가 다시 믿게 됨에 따라 저승이 부활한다는 상상도 짜릿하고요.
또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은 인간의 약한 모습, 악한 모습, 편견과 혐오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회사 내에서, 국제적인 회의에서 얼마나 여러 번 권위가 진실을 억누르곤 했나요. 지금도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이지요.
이 책에 대표적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교수에 대한 저승의 처벌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합니다.
책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3권 492p)
빌런을 저승 법정에 고발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인물에게, 저승의 차사가 말합니다.
"저승 법정은 믿으셔도 괜찮아요. 못다 이룬 정의 구현이 전문인걸요."
'이승이 살아 남은 가해자들의 땅이라면 저승은 먼저 죽은 피해자들의 땅이다.'
지연된 정의가 성취되는 곳.
권선징악이 되리라는 생각은 언제나 분노를 잠재웁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매력 만점의 등장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태양의 후예에서 열광했던 유시진 대위의 군인 정신, 환자를 대하는 의사 강모연 같은 인물들이 지구 최후의 순간에 있어 주네요. 자신의 휘하 장병을 보호하려 방사능에 피폭된 식량을 먹는 대위, 누군가를 죽도록 하는 선택은 거부하고 최후의 의무를 위해 초인적인 의지로 살아남는 과학자, 주어진 일을 마치기 위해 승천하지 못하는 연구자.
때때로 흔들리고 갈등하지만, 휴머니즘과 신념을 위해 용기를 내는 인물이 지구 최후의 프로젝트를 완수해 준다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마지막으로 빠질 수 없는 과학.
작가가 여러 부분 가공했다고 하지만, 탄탄한 과학이 토대인 소설인지라 천문학과 공학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과학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열광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쏘아 올린 전파를 우주 어디에선가 받아서 해독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도 어디에선가 보낸 전파가 도달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장엄기도 하고, 뒤집어 보면 부질없기도 한 계획을 위해 산 자와 죽은 자가 협업한다는 매혹적인 설정의 이야기. SF와 판타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 SF의 수준이 또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편집도 교정도 잘 되어 있어, 긴 분량이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오자를 한 군데 밖에 못 찾은 것은 제가 너무 빨리 읽은 탓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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