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듀나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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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시간에 인터넷 서점을 많이 본다. 어쩔 수 없음. 그것도 업무의 일환임! 그러던 중 발견했고, 궁금해서 냅다 도서관 희망 도서로 신청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은 건 내 책이 아니라 도서관 책인데, 다 읽고 필사 엄청 했어도 새 것 같기는 하지만, 이렇게 필사할 게 많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타이핑했을 거다. 며칠동안 나눠서 했다. 하...... 진짜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타이핑했지!!


리뷰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글 맨 하단에 쭉 실릴 문장 발췌에 대해 알아뒀으면 하는 게 있다. 그 문장을 누가 썼는지, 글의 제목은 무엇인지 밝혔다. 그리고 리뷰를 읽는 사람이 글의 중심을 잘 파악했으면 하는 마음에 제목과 부제 중 주제가 잘 드러나는 하나를 취사선택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가 확산됐다. 나도 이 말을 안다.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론이 강력 범죄의 가해자가 전도유망한 청년이고, 착실하고, 학벌도 좋고, 어쩌구, 이렇게 가해자 입장에서 뭔가 잔뜩 잘 써 주는 반면 피해자는 그 반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한국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한 사람들이 그리 주장했다.


그런데 어느 새인가 이 문장이 창작물에까지 확대됐다. 빌런 캐릭터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합리화할만한 여지를 주지 말라는 뜻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브컬쳐계 오타쿠 중에서는 자신의 도덕적 결백함에 강박을 느끼고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창작물을―창작자가 그 내용을 진심으로 옹호하는지 아니면 비판하는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올바른 텍스트 독해가 아니라 생각하는 바, 이 책이 더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아홉 명의 필자가 각기의 경험과 경력과 보고 있는 콘텐츠를 토대로 자기 의견을 쓴 글을 모았다. 그래서 같은 주제도 이렇게 접근할 수 있구나, 싶다. 나와 생각이 맞는 필자의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더 강화하고 보완도 하는 한편 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필자의 글로 시야가 더 넓어지고 새로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아홉 편의 글 중에서는 '이건 좀 생뚱맞은데.' 싶은 것도 있었지만, 언젠가 받아들일 날이 오겠거니.







그래서 트위터에서 듀나를 본 나에게 듀나의 글이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듀나는 창작물의 악역 캐릭터를 예로 든다. 창작자의 손을 떠나서 작품과 악역 캐릭터는 본래의 창작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런 캐릭터들의 팬덤, 유독한 팬덤을 언급한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지고 모든 주인공과 악당은 단순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당히 복잡하고 혼란스럽다고 한다.(41p)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멋대로 입맛에 맞춰 잘못되어도 상당히 잘못된 해석을 한다. 어차피 누군가는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덧붙일 테다.(46p) 그러니 "매 창작물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할 거라고,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은 소설일 뿐'같은 말은 거짓말이며 "어느 작가가 세상을 향해 한 마디라도 던졌다면 우린 그 말의 여파로 세상이 꿈틀거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47p)


(...) 과연 이들(수많은 연쇄 살인자들)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이야기꾼에게 소재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택한 소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냥 이야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로만',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같은 말들은 비겁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모든 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서사 예술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아니, 서사 예술은 특히 더 그렇다.

_24p







전승민의 글도 소개하고 싶다. 전승민은 소설 두 편과 논픽션 한 편을 다루며 나르시시스트가 악인이라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승민은 최근의 한국 소설을 두고 이렇게 썼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의 한국 소설은 텍스트 바깥의 악이 내부의 악과 긴밀히 연동되며 악이 지나치게 죄악시되는 형국을 보인다. 악은 제 얼굴을 내보일 조금의 자리도 허락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선은 투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와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둠 없는 빛을 좇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둠 없는 빛은 과연 무엇을 밝히는 빛일까?(어둠이 없는데 무언가를 밝히는 일은 가능할까?)

_80p

한국 소설의 애독자는 아니지만 가끔, 아주 가끔 읽는 사람으로서 근래의 소설은 지나치게 무해하다고 여긴다. 과하게 말하면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결백함에 강박을 갖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악이랄 것이 등장하지 않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트위터리안도 이런 내용을 지적했다. 무해하려고 한다고.


앞으로 이어진 글에서 전승민이 짚어내듯 주인공을 무해하게 꾸린다고 해서 그가 서사에서 무해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가 고도의 기술을 발휘해 그렇게 읽히도록 설계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저자는 정말 무해하고자 썼는데 거기서 허점이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전승민은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나'는 나이 많은 남성의 애정을 두고 또래의 여성에게 경쟁심과 질투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 여성을 사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결책을 레즈비언 커플의 세계에 투사한다. "소설은 '나'가 환멸을 느끼는 이성애적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두 여성 간의 사랑을 제시"한다.(91p) 전승민은 "여성 동성애는 이성애자 여성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대안"인지 질문한다.(92p) 소설에서는 여성 퀴어의 삶을 빛의 영역으로만 본다. 악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피해의식을 투사해 형성한 왜곡된 세계상일 뿐이다."(96p)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소설의 '나'가 여성 동성애 관계를 이렇게 바라보면 여성 동성애 관계 내부의 어둠이 조명받을 수 없다.


이 다음에 다루는 작품으로는 한정현의 『마고』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있다. 이 또한 생각할 점이 많은 글이니 내 리뷰에서 말하길 생각한다. 꼭 읽어보셨으면.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선한 빛을 비폭력의 수동성으로 치환해 받아들이고, 약자와 소수자의 당사자성을 피해자의 그것으로 물화해 주체의 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서사에서 퀴어와 여성들은 현실의 엄혹한 힘과 폭력 앞에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한없이 무력하게 사라진다. 연민하는 주체의 추억과 회고의 부속물로 물화된다. 진실한 선은 악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성장한다. 서사에서 악이 납작해지면 선 또한 평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학의 결과다. 게다가 악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니던가. 악의 의도적 소거와 표백은 '선한 인간'의 자기기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악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선의 얼굴은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대결해야 할 새로운 빌런이다.

_119p




이외에도 인상 깊은 내용이 많았지만, 직접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더 언급하지 않겠다.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잘 접하는 나에게 필요했다. 이를 발판삼아 내가 독자로서 더 발전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명민하지는 않다.


악역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일은 나도 고민하는 문제다. 사실 그렇다. 나도 정말 나쁜 놈이 사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해 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 싫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악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두환도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지만, 손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암기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걸 보면 현실의 악은 복잡하기만 하다.


그래서 듀나의 말처럼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한참 떨어질지라도,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인의 서사를 자주 접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렇다고 인정하자. 악인에게 좋은 면모가 있다면 좋다고도 인정하자. 하지만 그와 악행은 별개이며, 사회가 단죄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피해자의 삶을 조명하고 존중하고 그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자. 창작물에서 구현하는 복잡한 악인의 서사는 우리가 현실의 악인과 악행과 그의 삶을 마주할 때를 대비한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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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인용

최근 몇 년 새 우리 사회 한편에서 새로운 상식처럼 주창되고 있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표현이 이와 유사한 정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간명한 슬로건은 당초 현실의 잔혹 범죄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규탄하기 위해 대두됐지만, 머잖아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원칙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매혹과 연민의 시선으로 악인과 악행을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향해 이들 작품이 악을 비호하고 합리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된 것이다. 심지어 일반 관객과 독자뿐 아니라 일부 유명 배우들까지 여기에 공감의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악인의 서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은 더욱 대중화된 통설로 자리매김했다.
_편집자의 말 - P9

(...)과연 이들(수많은 연쇄 살인자들)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이야기꾼에게 소재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택한 소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어느 것도 그냥 이야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영화로만‘,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같은 말들은 비겁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모든 것은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서사 예술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아니, 서사 예술은 특히 더 그렇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4

(...)우리가 직접 경험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두움을 이해하는 작업에도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행위에 감상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깊은 의미가 있을까. 선을 공부하는 건 과연 그렇게 피상적이고 재미없는 일일까. 악당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재미있을까?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4

(...)그루버를 보다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기도 하지만 일단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 사실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악은 얄팍하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6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습관적으로 이 인물에게 내면을 불어넣는다. 기독교 국가에서 유대인으로 당했던 차별, 죽은 아내에 대한 추억이 삽입된다. 그리고 어느 단계부터 샤일록이 희곡의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 된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29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주인공과 악당이 존 매클레인과 한스 그루버 같다면 세상은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처럼 단순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혼란스럽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1

(...)창작자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창작물이 해석되지 않는다면 예술 작품의 감상은 권태롭기 그지없을 것이다. 반면 훌륭한 작품은 창작자가 예상치 못한 해석을 품고도 기꺼이 살아남을 것이다.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3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창작물의 악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악역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하지만 서사를 주지 않고 악역을 최대한 단순히 만들어도 누군가는 결국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덧붙일 것이다. (...)
_듀나,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 P46

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이는 구체적인 악의 얼굴을 고의적으로 표백하는 일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피해자성으로 함몰시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해 텍스트를 둘러싼 모든 존재자들이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다. 이때 주체가 함몰되는 피해자성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장과 비약의 왜곡을 통해서 인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유사하다. 물론 둘은 다르다. 피해자성은 피해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 당사자로서 가질 수 있는 맥락의 총체인 데 반해 나르시시즘은 세계를 인식할 때 타자의 실감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직 ‘나‘ 자신의 감정과 감각, 이해관계에만 몰입해 그것을 지켜내야 할 절대적 당위로 삼는 병적인 자기애다. (나르시시즘은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그의 낮은 자존감은 외부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끊임없이 조달받아야 한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2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을 비춰줄 타자의 거울이 언제나 필요하다 나르시시즘의 양태는 그가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지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지와 무관하게 발현된다. 그러므로 피해자성으로의 함몰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피해자의 당사자성을 존중하는 것이 ‘과도하게‘ 중요시되고 있다는 꼬인 비판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을 왜곡·비약·과장하는 나르시시즘이 일으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당부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3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빛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식이다.. 가장 악한 폭력은 가장 선한 표정의 얼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악을 행사하면서도 ‘나는 악이 아니야.‘라는 자의식 속에서―드러난다. ‘선‘을 표방하는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대상화하고 왜곡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겉으로 선한 ‘빛‘의 얼굴은 세계의 실체를 덮어버린다. 스스로가 어둠인 줄 모르는 빛, 제 행동이 악인 줄 조금도 인지할 수 없는 선의 무지각력은 악을 온전히 완성해낸다. 겉으로는 연민과 사랑이라는 기표를 드러내지만 결국 대상을 동정하는 주체의 우월한 시선을 강화하는 ‘빛‘은 악의 의도적 소거와 맞물려 있는 또 다른 ‘악‘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84

(...) 그러나 이때의 ‘여성성‘이 반反남성성으로 정의된다면, 여성(성)은 남성(성)을 대타항으로 가질 때에야 유표화될 수 있는, 독립적이지 않은 자질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94

(...) 게다가 퀴어의 삶을 이성애의 대안으로 투사하면 퀴어들이 겪는 현실의 난관은 이중으로 타자화해 한 단계 더 비가시화된다. 자신의 해방을 위해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그간 맞서온 가장 유구한 남성적 폭력과 그 시선 아니었던가? 게다가 어떤 세계가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선언해버리면 그 세계가 가진 어둠은 자동으로 소멸될 수 밖에 없다. 실재하는 어둠을 없다고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98

(...) 분류는 일종의 사다리 만들기다. 생물종들 사이에 선형적 위계와 우월 관계를 부여하는 이 행위의 목적은(음흉하게도) 사다리 제작자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기 위해서다. (...)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112

나르시시즘에 갇힌 주체는 선한 빛을 비폭력의 수동성으로 치환해 받아들이고, 약자와 소수자의 당사자성을 피해자의 그것으로 물화해 주체의 서사에 동원되는 희생양으로 전락시킨다. 그러한 서사에서 퀴어와 여성들은 현실의 엄혹한 힘과 폭력 앞에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한없이 무력하게 사라진다. 연민하는 주체의 추억과 회고의 부속물로 물화된다. 진실한 선은 악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성장한다. 서사에서 악이 납작해지면 선 또한 평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학의 결과다. 게다가 악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니던가. 악의 의도적 소거와 표백은 ‘선한 인간‘의 자기기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악을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선의 얼굴은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대결해야 할 새로운 빌런이다.
_전승민, 나르시시스트의 선한 얼굴은 어떻게 악이 되는가 - P119

(...) 악인의 이야기는 악행을 납득할 수 있게 하기보다 ‘악‘이 놓인 판단 기준과 그것의 분류 체계를 성찰하게 한다. 더 과감히 말하자면 악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 행위는 공동선과 윤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 우리는 악을 통해, 혹은 악이 일어난 이유를 살펴보면서, 혹은 악의 의미를 고찰하면서 그 반대편에 있는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다.
_강덕구, 서부극, 공동선과 윤리를 탐구하는 악인 서사 - P184

(...) 진짜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허구를 통해 자신을 비춰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들리는 혐오 표현, 악행에 정당화를 부여하는 서사가 허구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때로 불편하거나 역겨울 수 있는 거짓말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기원에 담긴 폭력의 정체를 따져 묻게 만들기도 하고, 우리 세계의 잔혹성을 고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허구는 내가 선택해야 할 선good을 나를 대신해 시뮬레이션해준다. 우리가 이야기와 허구를 포기한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탐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를 잃은 셈이다.
_강덕구, 서부극, 공동선과 윤리를 탐구하는 악인 서사 - P185

(...) 그러나 우리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행위‘가 올바른지 아닌지만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누가, 어떻게, 왜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그 위치를 구성하는 여러―역사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성적·인종적―맥락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창작물 속의 이야기가 모두 작가의 관점을 투명하게 대변한다는 ‘작가 환원주의‘ 시대에 이런 논의가 빠져 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 P191

문학은 첨예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응징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응징은 적어도 문학의 역할은 결코 아니며 (그렇다면 문학은 무력한가? 그렇지는 않다.) 당위를 한껏 부여해 ‘내가 옳으며 선하다,‘고 주장하는 장르도 아니다. 오히려 응징할 수 없는 악이 있음을 인정하는, 손쉬운 비난을 넘어서는, 날카롭고도 섬세한 성찰이 깃든 작품을 우리는 은밀하게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선함을 지향해서라기보다 ‘또 다른 (불의한) 나‘를 발견해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접하는 독자로서 우리는 ‘욕먹는‘ 일에 관한 강박과 검열로부터 잠시 탈출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에서 ‘불의한 나‘를 만나고 그와 얼싸안는다. (이어서)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3

문학이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은 조화와 안정과 화해라는 극적이고 낭만화된(심지어는 실현 불가능한) 이미지를 접할 때뿐 아니라 내가 감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것, 비난받을 게 두려워 홀로 숨기는 것, 그럼에도 엄연히 내 안에 도사린 불순한 욕망들과 적개심, 증오 같은 불쾌한 감정이 툭 불거져 나올 때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공적인 페르소나 없이, 당위를 넘어선 지점에서 이해받았다고 느낀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3

그러나 상징적 차원에서 ‘어머니 죽이기‘는 단순하지 않다. 모녀 관계는 대체로 보호나 의존이라는 문제에 지배와 피지배가 얽힌 복잡하고 유착적인 양상을 띤다. 여성인 딸의 내면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깊이 각인돼 있기에 딸들은 어머니를 벗어나는 데에도, 뒤틀리고 얽힌 감정을 분리하는 데에도 애를 먹는다. 강한 반발심이 생기거나 경멸, 혐오의 감정까지 치밀더라도 거리 두기는 어려워진다. 어머니는 딸의 최초의 양육자이자 원초적 대상, 딸과 같은 젠더로 분류되는 존재, 때로는 유사한 운명을 공유하기까지 하는 존재다. 그러니 명쾌한 감사나 용서, 혹은 공동 의존 관계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일이 힘겨울 수밖에. 많은 딸들이 인정하기 싫어할 테지만 이미 딸의 내면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능할‘ 정도로 깊숙이 침투해 있기에 딸에게 어머니 죽이기란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35

(...) 어머니는 전지적 영향력의 소유자, 그야말로 "최고 권력자"[11쪽]다. 에리카는 순간 광기에 휩싸여 어머니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잡아 뽑기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용하던 면도칼로 자신의 성기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뚝뚝 흐르는 피를 보며 에리카는 쾌감을 느낀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는 자해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니 몸에 상처를 내 벌을 줌으로써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지배 감각을 느끼는 파괴 욕구에 가까운 비틀린 ‘통제‘가 딸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청결을 향한 과도한 강박도, 관음증도 마찬가지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2

(...) 망상에 빠진 어머니가 불어넣은 공포와 열등감은 집구석에 대한 딸의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는 엄마가 미리 정해놓은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모험이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치는 게 아닐까요?" (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34쪽)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4

킨케이드의 어머니는 이렇듯 딸과 심리적 거리감 없이 엉켜 붙은 존재로, 일방적인 친밀감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을 딸에게 투사하며 딸의 욕망이 자신과 다를 수 있음을 한 치도 고려하지 않는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47

이쯤에서 눈 밝은 독자들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빌런화되는 작품에서 가해-피해 구도는 경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오히려 서사는 정치적으로 역동성을 띤다. 물론 비대칭적 관계에서 어머니가 일삼는 행위를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일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위치성을 전제한다. 이때 피해자는 정의로운 행위자로서 무조건적 옹호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애증적 모녀 서사에서 피해자는 절대적 정의가 아니며 가해자도 절대적 악이 아니다. 정의 구현, 악의 말끔한 제거, 응징은 가능하지 않다. 어머니와 딸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다가도 둘 사이의 가해-피해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기도 하며 그 관계성이 변화하기도 한다. 애증의 필연적 속성이 바로 그것이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0

어머니를 향해 도덕적 우월감을 표출하면서도 비틀린 애정을 수용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딸들의 모습은 지난한 관계성을 다시 비춘다. 따라서 어머니가 악인이니 무조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는 일방적 당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역으로 딸의 무결한 피해자성이 한없이 강조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자연히 주체의 인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성에는 물론 개성과 결핍이 포함될 것이다. 피해와 가해가 발생한 복잡한 층위와 맥락 전체를 살피지 않은 채 피해자성만을 선점하고 강조하는 행위는 때로 또 다른 권력을 낳기도 한다. 애증적 모녀 서사는 당사자성을 드러내면서도 손쉬운 선점과 확언을 비껴간다. 말끔하고 선악 구분이 확실한 길 대신,, 먼 길을 돌아가며 거의 불가능한 이해를 향해 간다. 따라서 어머니-빌런을 바라보는 독자의 섣부른 판단의 욕망을 유보한 채 이들 모녀의 구체적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1

우리 모두는 안다. 가족 이야기, 부모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로 인해 어떻게 얼마나 괴로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흔하고 뻔해 보인다는 것을. 그러나 가족 내 억압의 역사는 바로 그 손쉬운 판단 때문에 타자화된다. 부모와 거리를 두기 위해 부모를 악인으로 형상화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간신히 ‘(부모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빨리 ‘익숙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렇고 그런 것‘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부모가 맺어온 장구한 애증의 서사는 납작해진다. 자꾸 반복돼 피곤한 것, 그만 듣고 싶은 것, 그래서 대강 화해하거나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것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로 광기를 동반하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모녀 서사가 많은 이들에게 두루 사랑받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회피하고 싶은 것을 형상화하기에.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2

(...) 어떤 서사가 환영받고, 어떤 서사는 영원히 주변에 머무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무엇을 회피하고 싶은지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모면하고 싶은 바로 그것에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진실이 담겨 있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3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발견하는 진실이란 본질적으로 신경증적이며 부조리하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실은 부조리한 것 안에서만 그 자신을 드러낸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하며 깨끗하고 말끔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선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 대신 연대라는 단어를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 안에서도 작가나 독자로서 무해함을 지향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무해해지고 싶다.‘는 또 다른 욕망을 투사한 인정 투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만사에 무해하고 싶다는 욕망은 오만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표백하며 선함을 표방하는가?) 문학을 읽는 독자로서 우리는 정의 구현이나 악의 응징 같은 간편하고 단순한 해결책이 결코 실현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게는 악인인 그 지긋지긋한 빌런의 사정이야말로 때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_최리외, ‘빌런‘이 득시글거리는 모녀 서사 - P254

웹소설의 악인에도 창작자 개개인(나아가 주류 사회)의 편견과 혐오가 여과 없이 투영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특히 남성 판타지 장르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웹소설 작품이 기존 체제의 질서를 맹목적·무비판적으로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웹소설은 철저히 사회 주류의 시각만을 체화해 이에 거슬리는 존재들을 ‘빌런‘ 취급하는, 윤리적으로 실패한 장르일까? 나는 이 물음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으로, 웹소설에 섣불리 낙인을 찍기에 앞서 이 장르에서 악인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방식을 다층적으로 살펴볼 것을 제안하려 한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2

바로 이것이 악인 서사의 존재 유무 이상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헤아려야 할 두 번째 쟁점이다. 웹소설에서는 고유의 매체적 특징과 독법이 있고, 이를 폭넓게 살피지 않은 채 웹소설 속 악인의 서사 유무만을 따지는 건 유명무실한 일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악인의 서사를 제거하라‘는 지엽적 쟁점에서 탈피해 웹소설의 악인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작금의 웹소설이 악인을 다룰 때 직면하는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3

결국 2020년대 웹소설 시장에선 판타지, 무협, 로맨스 등 다양한 근대적 장르 구분이 만들어냈던 지위는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기호들이 특정 독자군에게 어떤 자동적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때 장르 관습 안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상호작용하기 위해 정형화된 약호를 코드code라고 부른다. 코드는 일종의 장르적 공공재로, 작품이 처음 등장한(혹은 주로 사용되던) 문화적 맥락과는 별개로 장르 독자 집단이 공유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끌어낸 일종의 장르적 밈meme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코드가 장르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창작-소비되고 있어 하나의 단일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4

악녀물에서의 악인은 보통 세 단계의 레이어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롤플레잉, 즉 배역으로서의 악인이다. (...) 단지 이 악역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캐릭터가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등이 중요할 뿐이다.
두 번째는 감정을 소비하기 위한 일회적 악인이다. (...)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이 정형화된 틀은 흔히 ‘고구마-사이다‘라고 불리는데, 현실 사회의 통념에 입각해 지극히 전형적인 악인과 그들의 악행에 고통받는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의 악은 웹소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최종 안타고니스트로서, 대부분은 작품 속 세계를 무너뜨리려는 절대악으로 표상되는 경우이다. (...)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65

이렇듯 웹소설 독자들은 서사의 완결이 아니라 특정 쾌감이나 쾌락을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소비하기 위해 작품을 읽는다. 주인공은 서사를 통해 무조건 가까운 행동만을 보여줄 뿐이고, 독자는 편 단위로 분절된 텍스트에서 더 이상 구조적 완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작품이 자신의 쾌감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댓글란에 ‘하차합니다.‘라는 선언을 남기고 결제를 멈춘다. 독자의 하차 선언은 작가에게 강력하고도 위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이는 작가의 생계와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극중 사건을 경험하며 마침내 도달하게 될 변화와 성찰,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던지고자 하는 질문 따위는 더 이상 문학 작품에 필요치 않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처지에 대한 상상력과 숙고는 사라지고, 자신의 전능감을 체험하려는 욕망과 소비자로서의 권리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1

웹소설과 관련된 윤리적 담론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상술한 바를 종합하자면 웹소설은 소비하는 독자 대중의 욕망과 혐오가 그대로 반영된 텍스트 콘텐츠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웹소설은 작품에 끊임없이 당위적 명령을 부과하고 도덕적 지향점을 교조적으로 선도하려는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흔히 남성향 판타지 웹소설에 쏟아지는 비판이 대표적인 예로, 일부 독자들은 남성향 판타지 웹소설이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옹호하고, 이 같은 사상적 입장을 후속 세대에 주입한다고 꼬집는다. 작중 인물들이 인간으로서 갖는 복합적 속성을 배제한 채 이들의 능력을 수치화하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납작하게 그려냄으로써 현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물신화·긍정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고, 이들 웹소설이 자본주의의 자기계발적 환상만을 보여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로맨스 소설이 가부장제하의 낭만화된 사랑을 공고화한다는 평가도 마찬가지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3

(...) 하지만 실상 이런 태도는 콘텐츠에 재현된 모든 사소한 코드를 강박적으로 해석하는 독서법의 연속에 불과하다. 웹소설에서 윤리를 어떻게 다룰지를 생산적으로 논의하기보다 작품에 대한 종합적 고려 없이 번번이 비슷한 요소에만 반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에 혐오의 꼬리표를 붙이는 데 소모적으로 집착하는데, 이런 꼬리표가 붙은 작품을 불매 등의 수단을 통해 장르의 역사나 시장에서 축출하는 데 매달린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4

제대로 된 웹소설 비평이 부재한 사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독자들의 댓글이다. 플랫폼에 따라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웹소설 플랫폼에는 댓글란에도 ‘좋아요‘와 ‘싫어요‘ 버튼이 달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자의 댓글에 대한 의견도 드러낼 수 있다. 이로써 댓글은 단순히 소설에 대한 감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웹소설에 기생하는 파라텍스트가 된다. (이어서)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5

댓글은 게시되는 즉시 타자에게 감상되고, 웹소설과 똑같이 평가된다. 댓글은 좋음과 싫음의 감정 자본을, ‘베스트 댓글‘이라는 자위를 갖는다. 즉 많은 독자의 동의를 받은 댓글은 그 자체로 작품과 독자 집단을 매개하는 중개자이자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 비평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일상의 탈권위적 언어를 사용하는 소비자가 시장의 비호 아래 비평가에 준하는 위상을 확보한 상황에서 시장의 외부자에 불과한 비평가는 이 굳건한 지위와 구조를 침범하려는 침략자처럼 여겨진다. 웹소설이 돈이 되니까 비평가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6

(...) 이들이 말하는 개연성은 사건의 인과관계에 그치지 않는다. 독자는 고구마로 재현한 현상이 현실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 고구마에 맞서 사이다가 실현됐을 때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추리 소설이 성립되려면 탐정이 논리적·과학적으로 추론한 추리가 들어맞을 수 있도록 과학 외의 우연성이 모두 제거된 세계가 전제돼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웹소설 독자들은 ‘고구마‘의 세계가 잘 재현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점검한다. 그래야만 ‘사이다‘ 장면을 통한 대리 만족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80

(...) 다시 말해 웹소설을 쓰는 작가는 현실을 재현한 세계에 비현실을 추구하는 캐릭터를 덧씌움으로써 독자에게 이 세계를 자각시키고, 독자는 웹소설이 비현실적 주인공을 통해 현실 속 불합리의 구조와 인과관계를 자각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웹소설을 쓰고 읽는 일에도 사회적 효용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독자들은 웹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회 문제를 텍스트 속으로 끊임없이 호명하고, 텍스트를 통해 여러 부조리를 자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웹소설을 느슨하고 넓은 의미의 사회운동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81

(...) "장르가 있어야 필자는 그에 맞서 글을 쓸 수 있고, 장르 관습이 있어야 필자는 관습의 파괴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장르라는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필자의 행위는 존재할 수 없고, 관습을 파괴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아니스 바와시·메리 요 레이프, 『장르: 역사·이론·연구·교육』, 정희모 외 옮김, 경진출판, 2015, 45쪽. (비평가 조너선 컬러의 말)
_이융희, 웹소설의 악인이라는 가짜 쟁점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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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9-04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라니님 저도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했어요! 같은 문제의식이 있었거든요. 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신청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책먹는고란 2023-09-04 20:12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안녕하세요!!! 리뷰 잘 읽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읽으면서 별 생각 없이 술술 넘겼는데 리뷰 쓰다 보니까 이거 진짜 중요한 거 같아서 힘줬는데 알아주셔서 기쁘네요...^-^*

˝그런데 서브컬쳐계 오타쿠 중에서는 자신의 도덕적 결백함에 강박을 느끼고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창작물을―창작자가 그 내용을 진심으로 옹호하는지 아니면 비판하는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올바른 텍스트 독해가 아니라 생각하는 바,˝ <<개인적으로 이 부분. 쓰면서도 좀 예민해서 손 떨었습니다.ㅋㅋㅋ

공쟝쟝 2023-09-04 20:25   좋아요 1 | URL
서브 컬쳐계의 오타쿠이신가요? ㅋㅋㅋ 제가 잘 몰라서 ㅋㅋ 서브 컬쳐...나 웹소 아예 몰라서요 ㅠㅜㅠㅠ 책이오면 곰곰 읽어보고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 정리해보긴 해야할 것 같아요. 문학의 경우 정말 소비자의 입장이었는 데,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살짝 궁금했는 데 이 리뷰 보고 완전 뽐뿌왔습니다.

헌데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강조되어야할 것은!!!
고라니님 글씨.... 대범함이 묻어나는 꽉찬 글씨........ 기개가 출중한 서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 주소 좀 알려주세요! 비밀용 이면 안알려줘두 되여ㅋㅋ

2023-09-0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09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