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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그리고 내가 일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고,
this bird had flown
새는 이미 날아가 버렸지.
비틀즈....노르웨이의 숲 中
죽음, 상실에서 오는 어두움과 공허함, 그 가운데 젊은이들의 원색적인 욕망...그리고 사랑,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이야기이다.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인물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이 시대 어느 한 귀퉁이에 살아 숨쉬고 있는 캐릭터 같았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만난 때는 내 나이 30대였다. 독박 육아에 지치고 힘든 가운데 하루키의 소설은 나에게 혁명적이었고 중간중간 나오는 하루키식 문체가 너무 좋아 줄을 긋고 또 그으며 읽은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상실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의미... 그 가운데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삶의 부적응과 비애. 간간이 드러나는 원색적인 부분들은 방황하는 청춘의 도피처로 보여졌다.
하루키는 책에서 음악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팝, 클래식 등을 매개체로 섞어 상황과 분위기를 다뤄낼 만큼 상당히 음악에 조예 깊고 박학다식하기에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무수한 음악들로만 만들어진 팬들의 주크박스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나 보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왠지 하루키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와타나베는 책 한 권을 몇 번씩 읽는다는 독서습관과 음악에 박학한 지식들을 연신 쏟아져 낸다. 하루키가 존경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책에서는 모두 4명이 그 삶의 일부였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기즈키의 죽음은 모호한 생과 사의 경계를 보여 준 느낌이다. 그가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와타나베는 죽음이 삶의 대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열일곱 자신의 내면속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미세한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여지고 있고 언젠가 우리를 잡아챌 것이라고... 삶은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음을 상기한다.
상실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크다. 존재의 부재를 느끼고 허전함이 시작되면 공허함과 불안이 엄습해 견딜 수 없게 된다. 나오코가 그랬다. 멀쩡한 듯 살아가면서도 실상은 곪아 있고 그 아픔을 가장 격렬하게 드러낸 인물로 보여졌다. 기즈키의 죽음과 언니의 죽음은 징후가 없었고 동일했다. 그렇게 아픔을 경험한 나오코는 점점 불완전한 인간으로 퇴색돼 간다. 나오코는 자신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요양원에서 만난 레이코 씨는 나오코를 돌보며 스스로를 치유했고 나오코의 죽음 후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아픔을 경험해도 모두 나오코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미도리는 달랐다. 역시 상실을 경험한 인물이었으나 좀은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긍정적이고 매력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발적이다. 그녀에게 있어 상실은 간단하고 익숙하다. 죽은 사람은 편하게 보내면 되고 산사람은 또 남아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 시점부터 반듯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현실이고 그 안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하나씩 세상을 알아가고 체득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공허함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삶이 지옥 같아 나오코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고, 충족되지 못한 삶 속에서도 한줌 희망을 갖고 버텨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신이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면서 잘 살아내라고 준 숙제 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나이가 들어갈 와타나베와 미도리, 그리고 나오코가 좋아하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또 한 번 혼탁한 삶 속에서 느끼는 청춘의 아픔을 되새겨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