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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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러지는 시나 소설 등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것으로, 대개 주제나 시대, 장르 등 특정한 기준에 따라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책을 의미한다.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는 그렇게 25명의 작가들이 다섯 가지 행동 [하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을 주제로 써 내려간 단편소설집이다. 예전 김영하 작가의 [보다. 말하다. 읽다.]라는 산문집이 살며시 겹쳐졌다. 이번 단편소설집 『걷다』에는 총 다섯 작품이 하나의 주제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채워져있다. 걷다에도 다양한 행위들이 있다. 함께 때로는 혼자, 음악을 들으며 또는 생각을 정리하며 등 다양한 행동들이 겹쳐지고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들이 곁들여진다.


『없는 셈 치고』는 어린 시절 어쩔 수 없이 고모 집에서 고모의 딸과 함께 성장해야만 했던 화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쉬이 사랑받을 수 없었으므로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나는 고모를 사랑했다. 어쩌면 고모가 저런 취급을 받고 사는 게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없는 셈 치고 중



암에 걸린 고모를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을 나가버린 고모의 딸 민아는 없는 셈 치고 대신 수시로 케어해야만 하는 화자의 고충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고모는 늘 딸같이 키웠다고 이야기하지만 은연중에 자신의 노고를 강조한다. 짧은 소설 속 시대에 만연하는 이기주의와 사이비 종교 등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까지 드러나 구성이 탄탄하게 읽혔다.


성해나 작가의 「후보(後步)」는 오랜 기간 한자리에서 붙박이로 철물점을 운영한 근성이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움직이는 동네 문화와 퇴보해 가는 상권을 아쉬워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수십 년 전부터 같은 동네에 자리한 재즈 바 '클럽 상수시'는 근성과 바의 주인 세실리아의 추억의 시간들을 반추한다. 이 작품에서 '걷다'는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근성에게 의사가 뒤로 걷기를 해보라는 조언을 해주는데 작품 속 점점 퇴행해 가는 마을 상권의 이야기와 조화롭게 연결되었다. 클럽의 이름 <상수시>가 의아했는데 '근심이 사라지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애정이 더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작가 이주혜를 알게 되어 반갑다. 거침없는 필력과 오래 기억될 문장들의 힘을 읽고 작가의 다른 책들을 두루 찾아 읽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이를 통한 오해와 이해의 문제를 깊고 섬세하게 그려둔 작가 이주혜는 「유월이니까」에서, 아내와 헤어진 화자가 운동장 트랙을 돌며 마주치는 어느 낯선 여성. 그리고 급하게 화장실에 다녀와야 한다며 자기 아내를 잠시 맡아 달라는 이상한 남자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그 남자가 부탁한 아내는 뜻밖에도 하늘을 나는 연이다.


너를 사랑하고 너와 같이 살고 너와 함께 미래를 계획할 때 변수는 늘 너였고 나는 상수를 자처했기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변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밤마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흘낏거리며 트랙을 돌고 또 도는 건지도 몰랐다.

유월이니까 중


그 밖에도 『유령 개 산책하기』는 상상한 것을 일상에 접목시킨 작가 임선우의 매력이 돋보이는 단편이다. 언니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와 다시 나에게 유기해버린 열세 살의 품종개 하지는 나에게로 와서 석 달 만에 병으로 돌연사한다. 그런 하지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다시 나에게로 유령으로 돌아와 데리고 살아있을 때 좋아했던 곳으로 산책을 나선다.


하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충분히 사랑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주 슬프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밤, 나는 체중계 위에서 뜻밖의 미안한 감정과 더불어... 그 늙고 커다란 개가 조금은 그리워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죽은 지 한 달 만에 하지가 돌아와 있었다.

유령개 산책하기 중

『걷다』의 마지막 작품은 임현 작가의 『느리게 흩어지기』이다.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러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다 보내고 남편도 자녀도 없는 50대 중반 명길의 이야기이다. 도서관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성희와는 열 살 넘게 차이 나는데 살짝 특이한 인물이라 그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오래전 <그>에 대해, 걸으면서도 머릿속에 가득한 여러 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명길이 나와 같은 연령대라 작고 소소한 주변의 상황과 감정까지도 속 깊게 이해되었다.




동사 걷다. 하나를 글감의 주제로 던져주었는데 참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 감탄했다.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지혜가 늘어나고 쓰면 쓸수록 실력이 향상된다. 어떻게 글을 쓸까? 시작조차도 못하고 시간만 지체하던 나에게 자극이 된 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듯 거창한 주제를 찾기보다 이처럼 작은 주제로 하나하나씩 에세이도 단편소설도 써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앤솔러지의 또 다른 주제의 단편도 꼭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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