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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ㅣ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평점 :

천사가 날 대신해.
김명순과 박민정 / 작가정신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의 글은 근대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대사가 오디오로 들리는 기분이고 흑백영화의 영상이 저절로 그려진다. 시인이자 기자, 평론가, 번역가 등 다재다능했던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봉건적 사대주의인 남성 주류의 문단 세계에서 우수한 그녀의 작품은 비난과 공격을 받았고 처절하게 받은 고통은 세상을 향해 작품으로 쏟아냈다.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는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과 현대 여성 작가 박민정의 백 년이라는 시간차를 과감히 뛰어넘은 만남이다. 두 작가의 세계관은 남녀 차별 없이 대등하고 주체적이며 차별 없는 세상을 바란다.
▶ 짧은 책 소개
김명순의 소설 『의심의 소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대동강 근처 마을로 이사 온 예쁜 소녀 범네 이야기다. 이 가족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가득 받고 있지만 전혀 교류하지 않고 어린 범네는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사 온 지 2년이 지나서야 이장의 딸 특실이와 범네는 친구가 된다. 할아버지가 범네를 밖으로 돌리지 않았던 이유는 한 신사가 마을에 나타나면서 밝혀진다. 평양성 내 이름난 미인이었던 범네의 엄마는 방탕한 남편을 만나 생고생을 하다 자살하고 만다. 마을에 나타난 신사는 범네의 아버지였고 할아버지는 범네를 해할까 두려워 정착하지 못하고 또 마을을 떠난다.
『돌아다볼 때』 역시 봉건적 가부장제 속 소련의 안타까운 삶을 읽는다. 소련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니라 첩이었고 일부다처제가 당연시되었던 사회에서 소련 역시 나쁜 피를 받은 게 아닌가 걱정하던 고모에 의해 소련이 마음에 두고 있는 유부남 효순을 멀리하고 마음도 없는 최병서와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의 학대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참아내며 더욱 자신의 노동과 수학과 사랑을 게을리하지 않고 효순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 나간다.
『외로운 사람들』 은 최 씨 집안의 4남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여성인 순희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인 정택과 사랑에 빠져 동경으로 도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순희는 동경에서 또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뺏겨 정택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순희의 동생 순철 역시 유부남이나 유학에서 만난 또 다른 여인 순영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소설은 작가의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음을 짐작한다. 시대적으로 남성적 권위주의와 여성의 활약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절망하는 김명순의 고통이 작품으로 드러나 있다.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의 소설이다. 죽을 만치 힘들었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한 친구 세윤이 갑작스레 죽음을 택하고 남아있는 나는 뼈아픈 상실감을 느낀다. 학창 시절부터 본인은 스스로 친구 세윤처럼 정상적 삶을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대학 후배이자 죽은 세윤의 직장동료이기도 했던 로사의 등장은 새롭다. 학교 다닐 때부터 이타심이 강한 로사의 행동을 바라보는 나는 부정적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선 선역도 악역도 여자야.
좀은 특이하고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인물인 로사는 영악하다. 없는 소문을 만들어내 세윤을 직장에서 고립시키고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이중적인 인간상과 상처받는 여린 영혼, 선역도 악역도 여자라는 말은 최근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해 공감이 갔다. 꼭 폭력을 써야 폭력은 아니다. 한 사람이 지독하게 소외되어도 어느 누구 하나 그 문제를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이자 고통이기도 하다.

▶ 읽은 후 감상
현대사회의 폭력과 혐오에 대한 글을 주로 쓴 박민정 작가의 글이 관심이 갔다. 솔직히 근대 소설은 읽으면서도 사랑방 손님의 옥희처럼 읽는 대사가 사운드처럼 머릿속에서 들려와 집중하기 힘들었다. "어머니, 오늘은 꾸지람 마십쇼." "아이 언니, 어쩌면 내가 들어오는데 모른체하고 있수?" 그럼에도 근대작가 김명순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확연히 드러남을 읽었다.
남성 우위와 이로 인해 소외된 여성의 삶을 드러내며 여성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백 년 전 부터 글로 드러낸 김명순 작가의 작품들이 작가정신의 잇다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더불어 시공간을 초월해 여성이 겪는 고통을 현대적으로 드러낸 박민정의 작품도 놀라운 가독성에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