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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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지은이) // 문학동네(출판사)



여느 세상과 다를게 없는 고즈늑한 마을의 풍경.

특이한 점은 세상 속 하나의 대상을 기억 전체에서 잃어버리고 그 과정 또한 아주 간단하다. 문제는 기억을 잃고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예고되지 않고 느닷없이 '소멸'이 시작될 때는 또 특이한 공기의 까슬한 느낌이 있어 그 신호를 전한다.

사람들은 충분히 많은 것을 잃으면서 살아간다.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던 물건도 기억속에서 소멸되고 나 자신에게 그런 물건이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 못할 때가 있다. 이 소설은 이런 류의 분실과는 좀은 다른 결이다.

소설을 써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나'는 전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소재로 글을 쓴다. 사람들이 다들 그런 류의 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수시로 찾아오는 소멸은 사라짐과 동시에 그와 연관된 모든 기억도 함께 빼앗아 가버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억을 동일하게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소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비밀경찰은 끝까지 그들을 찾아내어 어딘가로 끌고가는 '기억사냥' 임무를 하고 있다. 기억을 놓지 않는 그들이 기억사냥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은신하는 곳 '은신처' 숨어 있는 것 말고는 달리 그들에게 방법이 없다.



은신처

볼 때마다 그의 윤곽이 흐릿해지고 , 혈액이 묽어지고, 근육이 쪼그라 드는 것 같다. 체포의 공포에 휩싸인 이 비좁은 방에 지내려면 , 어쩔수없이 과잉한 요소를 증발시켜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것을 담아 둘 수 있는 대신, 육체는 에너지를 잃어 가는 것이다.

page 158



달력의 소멸

생각해 보면 그저 숫자의 나열일 뿐이다.물론 처음에는 불편함이 있겠지만 , 날짜를 헤아리는 방법은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소멸은 비밀 경찰의 생각만큼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게는 이렇게 불을 붙이면 사라진다. 그리고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상관없이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갈 뿐이다.page 179


오가와 요코는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번역이 이루어지는 일본작가로 손꼽힌다. 장편소설인 은밀한 결정은 1994년에 출간되었고 뒤늦은 2019년에 영문판이 번역되어 맨부커상과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작품이 쓰인 시기가 무척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서 쓴 소설인 듯 현재와 비교해 뒤쳐질게 없는 소재로 보인다.

작가 스스로가 안네의 일기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니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도 마을 사람들이 점점 그 부당함조차도 당연시하는 수동적 상태의 모습들에서 소멸과 기억의 분실에 대한 무기력함을 읽게 된다.

나는 슬퍼한다. 그들이 그리웠고, 그들 생전에 버릇 없이 굴고 심술부린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은 시간과 함께 절로 누그러 들었다. 죽음은 시간과 함께 점점 멀어지고 기억만이, 우리에게 더할 나위없이 귀중한 기억만이 남았다.(page324)

인간은 소멸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외는 없고 소설 밖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현재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한 듯이 잃어버리고 소멸시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과거의 기술들은 추억으로 한켠에 자리잡는다. 예쁜 편지지를 사서 손으로 꼼꼼히 적어 내려가던 손편지의 정성도 점점 편리함에 밀려나가게 되고 하나,둘,셋 하면 숨을 참아가며 꼼짝하지 않고 서있던 필름카메라 사진도 디지털 카메라에 밀려 추억이 되어 가고 있다.그나마 레트로라는 부메랑 같은 유행이 있어 조금씩 추억을 되찾아 가기도 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소중한건 소중한 것이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R의 말이 책을 덮으며 한켠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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