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유년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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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로 보인다.

옌롄커의 작품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문단의 지지와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성취한 ‘가장 폭발력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일광 유년』은 옌롄커가 온몸으로 쓴 역작이며 책을 쓰면서 심각한 요추 부상 속에서도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체형에 맞게 특별 제작한 특수 선반 위에서 4년 동안 의지하며 이 소설을 완성해냈다고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작가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담아냈으니 결과물인 『일광 유년』은 그의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가볍지 않은 책이었다. 두께부터 955페이지의 분량이며 조금은 혼란스러울 수 있는 소설 속 시간적 배경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주인공들의 강렬하고 극단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소설 속 배경은 중국 내 바러우 산맥 깊은 골짜기 산싱촌이라는 마을에서 시작된다. 죽음은 몹시도 이 마을을 편애했고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수시로 이 마을을 감싸 안았으며 비온 뒤 버섯처럼 무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시작은 마을 사람들이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목구멍이 막히는 증상으로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책은 총 5부작으로 나누어진다. 한 씨. 두 씨. 쓰마씨 세 가지의 성을 가진 주민으로 이루어진 한마을 안에서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세월이 그려진 책이다.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이 등장하는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변하고 있어 읽는 도중 약간의 혼돈이 올 수도 있으나 독자들을 집중하게 하는 옌롄커의 필력이 이 모두를 충분히 커버하고 있다.

마을의 촌장인 쓰마란이 39살이 되면서 죽음의 그늘이 자신에게도 다가오자 살고자 몸부림 치는 내용들이다. 자신이 살아야 생명수인 링인수를 끌어 올 수 있고 그래야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물을 마시고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이유를 달고 자신의 수술을 위해 비용을 마련하고자 주변 사람들에게 모순된 희생을 강요한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사람 란쓰스에게 인육장사(매춘)를 하게 하고 그 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에서는 촌장이라는 허울로 자신의 삶을 연장하고 싶은 치졸한 인간의 욕망이 보여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햇빛은 흐리고 어두웠다. 구름도 잿빛으로 하늘에 떠 있었다. 집집마다 개들도 나와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출정을 앞두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page192)

드디어 멈춰졌던 수로공사에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시작되었고 그 결말은 비참하리만큼 처절한 모습이다.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그토록 쓰마란이 고집하며 지위를 내세워 추진하고자 했던 일들이 그들의 한줌 같은 목숨까지 잃게 만들며 그보다 얕았던 희망까지 하늘하늘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다.

란바이수이는 루주임의 어투에서 촌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고 가치없는지 알 수 있었다.

(page543)

란바이수이는 쓰마란이 촌장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나보다. 제멋대로 할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개간사업을 담당하는 루주임에게 쓰마란이 촌장으로 적합하다는 말을 들은 후 란바이수이는 쓰마란의 엄마를 겁탈(?)한다. 그렇게라도 쓰마란을 자신의 발 밑에 두고 싶었나보다.

그러고보니 마을에 촌장이 바뀔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왜 빨리 죽어가는지 원인이 달라지는 모습이다. 쓰마란이 촌장이 되기 전 란쓰스의 아버지 란바이수이는 마을의 흙을 갈아 엎었다. 흙을 바꾸는 방법 이외에는 마을 사람들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확고한 고집이었다. 쓰마란에게는 란바이수이에게 없는 것이 보였다. 확고한 패기와 란바이수이보다는 영민해 보이는 계략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치졸함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또 뭐든지 다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age594

쓰마란이 촌장이 되었다. 영악하고 사리 밝은 주추이가 촌장의 아내가 되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쓰마란을 회유한다. 란쓰스는 희생을 강요당한 삶을 살아내며 그 와중에도 곧은 그녀의 심지 역시 주추이 못지 않음을 발견한다.

수로 공사를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마을의 건장한 남자들은 피부를 판다. 이 상황을 통해 돈에 맛들이기 시작하고 소유의 욕구도 가지게 된다. 마을 공동의 이익을 위한 희생은 점점 더 그 가치를 잃어 가는 모습이고 촌장인 쓰마란의 집착과 명령.회유도 더불어 희미해 지기 시작한다.

누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권력과 삶과 본능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욕망은 보잘 것 없는 흙 한줌도 되지 못할 것을 굳이 가지려고 발악을 한다. 비록 한갖 허구에 불과한 소설이지만 이름도 찾기 힘든 작은 시골마을 촌장이라는 지극히 하찮은 권력 하나에 "이 사업은 너희들을 위해 하는거야!" 라며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파시즘적인 행위는 어느 나라 어느 장소에나 종종 산재하고 있는 사회악으로 보여졌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 책은 원초적인 인간의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조건이며 촌장이라는 하찮은 권력에 성애. 생육을 바탕으로 한 욕망의 이중주라고 한마디로 표현한다. 권력에 의해 지배된 욕망은 죽음이나 빈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악이 자리하는 곳이 되기 십상이라고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작품은 농촌의 삶은 순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 서사의 전과정에 죽음이 수반 되었으며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보여졌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게 공존하고 있으며 북음이 삶이고 삶이 곧 죽음임을 보여준다.

올해 가장 집중해서 읽었던 책이고 페이지수로는 가장 두꺼운 한권의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은 권력에 집착했지만 쓰마란에 대한 란쓰스의 애정은 깊었고 애잔하다. 옌롄커의 책은 앞으로 나 스스로 찾아서 읽어야 할 목록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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