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죽음을 건 내기다.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낸 마취제요, 환각제다.
성과 죽음의 관능성을 가장 잘 입증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 그는 인간의 본능을 생명 본능과 죽음 본능으로 대별하여 각각 사랑의 신 에로스Eros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이름을 붙였다. 죽음의 본능은 간단히 말해 유기물이 자신의 내적 긴장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원상태(무기물상태)인 죽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이다. 프로이트의 ‘쾌락의 원칙‘에 따르면, 괘락은 긴장과 소멸의 정점이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다른 무엇일까?
어떤 번역도 반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엉성한 번역이 괴테, 바이런, 니체, 지드 같은 문호들의 영혼에 천둥과 번개가 내려친 것이다.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건물 정문 입구에 하페즈의 시가 이란어로 적혀 있다. <아담의 후예>라는 제목의 시다. 몽골 군사가 천지를 휩쓸고 지나갈 때, 세계 평화와 인류 모두의 안녕을 희구하며 쓴 시다.
"인류는 한 몸 한 뿌리에서 나온 영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지."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부름세
백년 덧 시름 잊을 일을 얘기코자 하노라
-조선 숙종 대의 문신 김성최의 시조
김형경은 <남자를 위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단둘이 있을 때, 혹은 남자들끼리만 있는 자리에서 얼마나 파괴적이 되는지, 화제는 저열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작은 일로도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곧잘 파괴적인 분위기로 치닫는다. 하지만 그곳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남자들은 부드러워지고 신사적인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게임의 룰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많은 교수가 정치나 관직에 관심을 둔다. ‘학자가 정치에 나서면 성공은 없고 종말만 있을 뿐‘이라는 경구가 있다. 정치나 행정은 사람과 제도를 움직이는 일이다. 지식과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수가 강단을 떠나 성공하는 예가 드물다. ‘공을 이루면 스스로 물러나는것이 하늘의 도리‘라는 말도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응시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눈‘, ‘탐욕으로 가득 찬 눈‘ 이라고 강조한다. 현실적으로 ‘선한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응시가 사악한 이유는 그것이 욕망하는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시기심을 낳으며, 시기심은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폭력성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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