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사학년이었다. 그때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돌이킬 수 없이 완전무결한 삶의 종말이라는 것을 몰랐고, 다만 아득히 멀고 모호한 곳으로 실려가는 것으로 알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었지만, 여고 시절에 보훈처로부터 받은 공문이 이제 소멸해버린 할아버지를 내 마음속에 되살려놓았다. 만주에서 지낸할아버지의 삶이 망명인지 이주인지 유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공문을 읽고 나니까 망명지에서 다시 망명을 했거나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길에 나섰듯이 유랑지를 다시 버리고 더멀고 외진 곳으로 흘러다니는 할아버지와 그 뒤를 따라다니는어린 아버지의 모습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 모습은, 할아버지가 죽던 날, 내 유년의 의식에 떠올랐던 죽음의 모습과 닮아있었다는 것을 나는 훨씬 더 자란 뒤에야 깨달았다. 말하자면,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삶과 죽음이 분리되기 이전이며, 삶을이루는 지속의 대열 속으로 편입되기 이전의 공간과 시간 속을 흘러다니는 발생과정의 유동체였다. 내 여고 시절의 몽환속에서, 그 유동체는 지평선 너머 먼 곳에서 이곳의 삶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 반대방향으로 흘로가는 것 같기도 했다.
미국 건설투자업계에서 발생된 파산과 채무 불이행 사태가 몰고 온 경기 침체의 여파가 한국의 재벌기업과 그 하청업체 그리고 정부 산하 기업들을 거쳐서 영세한 민간 디자인회사에까지 밀어닥치고 있었다. 세상이 돈과 먹이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먹이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먹이사슬의 저 꼭대기에서부터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달아나듯이 아래쪽으로 연결된 먹이의 고리를 끊어냈다. 세상이 돈과 먹이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그것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것인지를 분석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지만 분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연결인지 차단인지, 나는 말의 뜻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또 거기에 무슨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2월에 나는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고 직장을 떠난 실직자였다. ‘일신상의이유‘로 자진사퇴한다는 형식이었지만,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도 월급을 받을 수 없었을 테니까 자진사퇴나 해직이나 별 차이 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돌이켜본다‘는 이 말이 도덕적으로 반성은 아니다. 돌이켜본다는 말은 돌이켜 보인다라고 써야 옳겠다. 보여야 보이는 것이고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닐 터이다. 돈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겨우 보이는 수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돈 떨어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계가 막막해진 저녁에 오래전에 죽은 말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는 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어지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던 그 구매력이 빠져나가면서 돈의 실체는 드러나는 것인데, 돈이 떨어져야 보이게 되는 돈의 실체는 사실상 돈이 아닌 것이어서, 돈은 명료하면서도 난해하다. 돈은 아마도 기호이면서 실체인것 같은데, 돈이 떨어져야만 그 명료성과 난해성을 동시에 알수가 있다. 구매력이 주는 위안은 생리적인 것이어서 자각증세가 없는데, 그 증세가 빠져나갈 때는 자각증세가 있다. 그래서 그 증세를 느낄 때가 자각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자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돈이 떨어져봐야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증세는 생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생리 그 자체여서 거기에 약간의 속임수가 섞여 있어도 안정을 누리는 동안 그 속임수는 자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그리고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돈이 다 떨어졌을 때 생각나는 돈은 돈의 환영이거나, 돈에 대한 절박함일 터인데, 없는 돈이 간힌 아버지를 끌어당겨준다. 아버지가 구속수감된 후에, 죄수복을 입고 감방 안에 들어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삶이란 생리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가족들의 생리적인 삶만이 아버지의 모든 진실이었다. 그리고 돈은 삶의 생리를 보호하고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방편이며 조건이자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영위되는 삶은 허위나 가식이 아니고, 영광이나 수치가 아니고, 선악미추의 분간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받아내고 견뎌야 할, 빼도 박도 못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눈 덮인 숲속의 나무들은 눈과 숲의 역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없었다. 나무는 숲속에 살고, 드문드문 서 있는 그 삶의 회양으로서 숲을 이루지만, 나무는 숲의 익명성에 파묻히지 않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는 외롭지 않고, 다만 단독했다. 그것이 사람과 나무의 차이였고, 나는 그 차이를 처음 만나는 젊은 장교 옆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메말랐다. 그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음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 대상을 단지 사물로서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밀쳐내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불러서, 내가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다 나를 주저앉히는 듯했다. 그렇게 낯선 목소리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느낌들이 그를 처음 대면한 순간의 느낌이었는지 아니면 그후에 조금씩 쌓여서 굳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마음이 켜를 이루고 결을 이루면 거기에 무늬들이 뒤엉켜서 가늘고 혹은 날카로운 느낌들 사이의 선후관계를 알 수 없게 되는 모양이다.
사진은 꽃과 나무의 생명의 표정과 질감을 표현하기에는 미흡한데, 그 까닭은 사진의 사실성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적 기능 때문에 오히려 생명의 사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며, 생명의 사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시선과 인간의 몸을 통과해 나온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상을 표현하는 인간의 몸짓에는 주관적 정서가 개입하겠지만 생명의 사실에서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대화가 아니라, 오랫동안 읽어온 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식물의 구조가 중첩되거나 연결되는 부위의 표정, 식물의 생명 속을 흐르는 시간, 아침과 저녁의 이파리들의 표정의 차이를 드러내려면 우선 확대경과 현미경을 써서 세포의 안쪽과 연결부위를 들여다보는 훈련을 거쳐야 하고, 식물 세밀화 작업은 미술이 아니라 기술적 방법을 동원한 과학이지만, 주관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이 과학의 조건은 아닐 것이며 식물 세밀화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결과물은 생명을 옮겨놓은 화폭으로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나를 향해서 말한다기보다는 허공에 대고 혼자서 말하는듯 싶었다. 그는 식물종자학을 전공한 연구직 공무원이었지만 자신의 전공분야를 위해 미술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무의 줄기에서, 늙은 세대의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잡고, 젊은 세대의 나이테는 껍질 쪽으로 들어서는데, 중심부의 늙은 목질은 말라서 무기물화되었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무위無爲의 세월을 수천 년씩 이어가는데, 그 굳어버린 무위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땅 위에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수목생리학에서 배웠다. 줄기의 외곽을 이루는 젊은 목질부는 생산과 노동과 대사를 거듭하면서 늙어져서 안쪽으로 밀려나고, 다시 그 외곽은 젊음으로 교체되므로, 나무는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삶에서는 젊음과 늙음, 죽음과 신생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다. 나무의 푸른 이파리가 빛과 공기와 물을 섞어서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내므로, 숲 전체는 이 원초적이고 무구한 양식과 더불어 자족한다고 연구실 관리계장은 광합성작용을 설명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물어보자 관리계장은다 알려고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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