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잠에서 깨면, 새소리가 쏟아져들어왔다. 숲에 사는 새들의 모든 종족들이 울어대는 소리였다. 새들은 내가 어머니의 전화에 시달리다가 잠드는 밤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전혀 다른 아침을 맞는 듯싶었다. 잠이 덜 깨서, 떠도는 의식 속으로 새소리는 아침마다 쏟아져들어왔다. 새소리에 떠밀려서 나는 처음 맞닥뜨리는 낯선 시간 앞으로 밀쳐졌다. 새들은 소리쳐서 일출을 맞았고 나는 아침의 시간에 이마를 부딪혔다.
봄으로 다가갈수록 새들의 아침은 바쁘고 요란했다. 새들은 영세유전하는 그 종족의 소리로 제가끔 울어대는 것이어서,
아침 새들의 소리는 온 숲에 넘치고 들끓어도 섞이지는 않았다. 새들은 일제히 울었고, 저마다 따로 울었다. 아무도 듣는 자가 없는 밤에도 새들은 제 목청으로 제 울음을 울어댔다. 새들의 소리는 그 종족이 건너온 수억만 년의 시공을 향해서 토해내는 독백처럼 들렸다.
나무들도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인지, 멀리서 새벽의 여린 햇살이 다가오면 잔설 속에서 봄을 맞는 숲은 짙은 풋내를 풍겼다. 자등령 숲에는 한겨울에도 봄이 숨어 있어서 햇살이 곧은 한낮에는 산의 젖은 날숨이 능선 위 허공에 엉겨 있었다. 숲에는 계절이 포개져 있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봉오리가 깨어나는 새벽이나 봉오리가 문을 닫는 저녁 무렵, 활엽수의 넓은 잎이 무더위에 지쳐서 늘어지는 한낮에 야외에서 식물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풀을 들여다보면서,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식물들의 시간을 나는 느꼈다.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맑고 추운 초봄의 한낮에 햇빛이 직각으로 내리쬐면 얼었던 늪은 쾅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것이 늪의 새해였다. 얼음이 녹은 늪의 수면은 팽팽했고, 거기에 물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녀도 물은 주름잡혔다. 초봄의 아침에 짙은 색의 꽃들은 흑백의 화면에서 돌출하듯이 피어났다.

색깔이 달라져서 그리기를 포기한 꽃들도 있었다. 수채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서 색의 깊이를 쌓아갔으나, 식물이 꽃에 거듭색칠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색깔에도 촉감이 있는지, 진달래꽃의 색깔은 구겨져서 바래었고 작약의 색깔은 기름졌다.
늪가의 물안개 속에서 핀 도라지꽃의 보라색은 젖어서 축축했고 한낮의 패랭이꽃의 자주색은 팽팽했다. 나는 그 꽃들의 색과 비슷한 물감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서 이 색 저 색을 섞고 덧칠하는 수밖에 없었다. 숲에서, 나는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앞에 있었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세밀화는 그 기웃거림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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