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골을 들여다보면서 몰래 시선을 들어서 김민수 중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굳은 표정은 해독하기 어려웠다. 그 역사 시선을 들어서 내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에 내 얼굴은 어떻게 비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골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또 김민수 중위의 고향, 그의 가족, 그의 대학 전공과 제대 후의 진로, 그의 독서, 그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것들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물어보는 그런 하찮은 물음들을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묻지는 못했다. 그도 나와 같은 충동을 느꼈을까. 그도 묻지 않았다. - P172
여름의 숲은 크고 깊게 숨쉬었다. 나무들의 들숨은 땅속의 먼 뿌리 끝까지 닿았고 날숨은 온 산맥에서 출렁거렸다. 뜨거운 습기에 흔들려서 산맥의 사면은 살아 있는 짐승의 옆구리처럼 오르내렸고 나무들의 숨이 산의 숨에 포개졌다. 소나기는 산맥의 먼 끝자락부터 훑으며 다가왔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안으로 눌려 있던 숲의 날숨이 비가 그치면 골짜기에 가득 차서 바람에 실려왔다. 비가 그친 한낮에 어린 벚나무숲의 바람은 가늘고 달았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내리쪼이면, 잎이 넓은 떡갈나무숲의 바닥에는 빛들이 덩어리로 뭉쳐서 흩어져 있었고, 뭉쳐진 빛들의 조각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그림자 사이를 떠다녔다. 잎이 가는 소나무나 전나무 숲에 빛이 닿을 때, 잎들의 사이를 지나면서 부서진 빛의 입자들이 미세한 가루로 숲의 바닥에 깔렸다. 빛의 가루들은 튕겨오르지 않았고, 땅에 쌓인 솔잎사이로 스며들어서 소나무숲은 흙 밑이 밝았다. 해가 들면, 젖은 숲이 마르면서 냄새를 토해냈다. 잎 큰 떡갈나무숲의 바닥 냄새는 무거웠고 소나무나 전나무 숲의 바닥냄새는 가벼웠다. 넓은 잎은 가는 잎보다 먼저 부식해서 흙이 되었는데, 넓은 잎이 삭은 흙이 쌓여서 오래된 흙의 깊은 냄새를 뿜었다. 그래서 늙은 숲의 냄새는 깊었고 젊은 숲의 바닥냄새는 얇고 선명했다. 젖은 나무에 빛이 닿으면, 햇빛을 받는 쪽으로 달린 잎들은 굵은 잎맥으로 기름기를 흘렸고, 그늘 쪽으로 달린 잎들에서는 여린 빛이 흘렀는데, 바람이 불면 잎들이 거느린 그림자 속에 빛이 뒤섞였다. 젖은 숲이 마를 때, 숲속의 나무들은 제가끔 한 그루의 발광체였다. 패랭이꽃과 노랑어리연꽃을 데생하다보니까 여름이었다. 풀과 꽃은 겨우 그릴 수 있지만 숲과 산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숲은 다가가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와서 숲속에는 숲만이 있었고 거기로 가는 길은 본래 없었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여야 보는 것일 터인데,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비 맞고 바람 쏘이고 냄새 맡고 숨 들이쉬며 여름을 보냈다. - P177
본다고 해서 다 그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본다와 보인다 사이가 그렇게 머니까 본다와 그린다 사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를, 그 아이의 뒤통수 가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가 자라고 여자가 늙는 것은 닥쳐오는 시간 앞에서 쩔쩔매는 난감한 사태일 터인데, 그림을 그려서 그 난감한 것들을 종이 위에 붙잡아놓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 어린아이의 가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만진다는 말이나 품는다는 말과는 대척점에 있는 반대말이었지만, 그 두 개의 국면이 반대되는 대척점에서 서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말일 수도 있다고, 그 어린아이의 멀어져가는 가마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 P187
안실장과 그의 동료들이 팀장이 설명한 그 어려운 의문점을 해결하고 연구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안실장 자신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안실장과 그의 동료들은 개미가 아니고, 개미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개미의 운명에 관한 자신들의 언어를 정립하고 그 언어의 구조물을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안실장은 말의 길이 끊어진 그 먼곳을 말을 앞세워서 말에 이끌려서 가려는 것인가. 그 길이 어리석은 미망의 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안실장과 그 동료들의 탓은 아닐 것이다. 안실장은 개미가 아니니까. 나는 개미를 들여다보고 있는 안실장 부자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멀어서 돌아올 수 없이 아득한 저쪽을, 그 아버지와 아들은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먼 곳을 더듬는 눈동자 네 개가 맑고 깊었다. 눈동자의 주인은 먼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눈동자만이 육신 쪽에 남아서 깜박이고 있었다. 눈동자 네 개가 똑같았다. - P191
아이를 부채질해주는 안요한 실장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 생각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갑자기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왔다.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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