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완전히 날조된 악소문에 의한 공격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소문이 아니라 범죄예요. 범죄와 소문은 다릅니다. 소문은 근거가 있어요. 박근혜의 예를 봅시다. 그 여자는 얼마 전까지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으로 있었어요. 그 정수장학회는 원주인이 박정희에게 빼앗긴 겁니다. 그래서 유신공주니 장물공주니 하는 소문은 박근혜가 다 감수해야 합니다. 소문이 싫으면 그런 내력을 가진 장학회의 이사장을 맡지 말았어야지요. 과거 유신 때, 최태민 목사라는 자가 박근혜의 후광으로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녔어요. 소문이 발전되어 그 목사와 박근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심지어는 둘 사이에 숨겨놓은 애까지 있다더라, 하는 데까지 갔지요. 그것도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소문이 싫으면 그런 엉성한 자를 곁에 두면서 뒤를 봐주지 말았어야죠. 그런 소문조차 없으면 힘을 장악한 권력자들의 비리를 막을 길이 없어요. 소문은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경고를 주는 거예요."
정치인 김대중의 소문론은 의외로 법조인 이준상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가 있었다. 김대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가 이번에 모든 소문을 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검증하겠다고 한 건 정치인으로 떳떳해요. 그래야지요. 과연 갈 데까지 갔는지, 숨겨놓은 아이가 있는지,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 다 터놓고 밝혀야지요. 이명박처럼 웃으면서 대답 않겠다느니, 상대편의 네거티브 전략이니 하면서 피하거나 법으로 엄단하겠다 운운하면서 소문의 확산을 막으려 드는 건 소문을 대하는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에요."
- P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훗날 나는 그날의 집회를 복기해보았다. 특히 첫번째 탈락자를 정하는 장면을 말이다. 아무래도 그 장면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마치 『침팬지 폴리틱스』에서 본 침팬지들의 정치적 투쟁과 비슷했다. 이인자 탱고는 일인자인 장군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싶지만 아직 그럴 능력이 되지 않으니 난데없이 힘이 약한 유리를 공격한다. 일인자인 장군은 이인자의 도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유리에 대한 공격을 모른 체한다. 그러면 유리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메두사는 하는 수 없이 탱고와 맞서야 한다. 결정은 마침내 팀의 리더인 장군의 몫으로 넘어간다. 유리를 내보내면 탱고의 뜻을 따르는 게 되니 곤란했다. 그렇다고 탱고와 맞서는 것은 오히려 그의 위상을 높여주고 이인자로서의 위치를 공인하는 꼴이 된다. 결국 메두사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판단이 불과 이 분 안에 이뤄진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고, 모두가 그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여전히 유령 같은 존재였고 그들 사이의 미묘한 권력투쟁의 구경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순간에도 이미 그들은 나에게 조용히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퀴즈 팀 안에서의 선택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골라 그 뒤에 줄을 서야 하는 국회의원들의 선택과는 성격이 달랐다. 국회의원들은 오직 정치권력이라는 변수만 고려하면 되지만 퀴즈 팀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일종의 길드로서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목적이란 퀴즈 리그에서 우승하여 큰돈을 벌고 이 세계에서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를 보스로 옹립하느냐와 누구를 축출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했다. 개인의 권력욕은 팀으로서의 효율성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권력욕만으로는 회사를 장악할 수 없었고 또 그런 사람을 용납하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회사‘ 였던 것이다.
- P384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전의 사건을 통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배웠다고 생각했다.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70

"그게 뭔데?"
"세상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는 거. 인간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반복되고 세상은 똑같다는 거야. 거긴 정말 이상한 곳이었는데, 처음에만 그랬을 뿐, 적응하고 나니 하나도 다른 게 없었어. 근데 넌 어떻게 지냈어? 방송국 일은 어때?"
-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은 잔인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남이 죽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겁니다. 퀴즈쇼는 로마 시대의 검투 같은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며 안도하는 겁니다.
자기 대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죠."
나는 토를 달았다.
"진짜 죽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도 나는 퀴즈쇼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탈락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안도했던 것일까? 이춘성이 말을 이었다.
"그렇죠. 진짜 죽는 것은 아니죠. 그들은 다시 부활합니다. 부활한 참가자들은 멋쩍게 웃으면서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는 식으로 말들을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맞히지 못했을 때의 그 끔찍한 표정 말입니다. 부끄러움과 절박함이 뒤섞인, 어떻게든 이 문제를 맞히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얼굴 근육까지 다 써가면서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싸울 때의 표정을 말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엔 마치 임사체험을 한 등반가들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 가족들의 모습, 즐거웠던 기억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순간 모든 것을 초탈하게 됩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꽉 붙들고 있던 정신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저 아래로 떨어지는 거지요. 그래도 잘했어.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최선을 다했으니 만족해. 이런 생각들이 지나가면서 뇌를 이완시킵니다. 최고조로 치닫던 긴장을 한순간에 누그러뜨리는 인체의 신비랄까요. 혹시 추락을 경험한 등반가들에 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라인홀트 메스너 같은 사람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읽어보셨군요."
"아니요. 그냥 이름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자기 할말만 계속했다.
"극도의 긴장 뒤에 찾아오는 편안한 순간,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을 위해 신이 예비해놓은 마지막 축복입니다.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분수처럼 뇌를 적시며 고통을 줄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추락이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 P235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아무리 대단한 영화도, 그 어떤 기상천외한 롤러코스터도 그것에 필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냄새가 있고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역사가 있다. 무엇보다 그 방은 삼차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나는뚜벅뚜벅 그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물건들은 만져볼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면 슬쩍 가져갈 수도 있다. 천장은 그녀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처음으로 보는 바로 그 천장이며 침대는 그녀가 자신의 온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바로 그 침대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서 우리는 얼마간 탐정이고, 또 얼마간은 변태이며, 그리고 또 얼마간은 수집가다. 방은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단서들로 가득하며 그것들은 나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서들은 하나같이 매혹적이다. 인기가수의 팬들이 아수라장을 틈타 그의 땀이 묻은 선글라스를 낚아채듯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손댄 그 어떤 것을 내 소유로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 P260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 나, 실은 이 말이 너무 좋았어. 너는 영혼, 모험 그리고 의미라는 말을 한 문장 안에 사용하고 있어. 나는 그게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을 인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나는 사람이 두 종류라고 생각해,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게 얇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않아.
현실만이 그들의 신앙이고 종교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가차없고 냉혹해. 물론 그런 사람들이 편할 때도 있지. 자기보다 강하고 부유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교를 쌓는 건 너무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든가,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득이 되나, 같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이야. 너는 무용한 걸 좋아하잖아. 지식, 퀴즈, 소설 같은 것들 말야."
- P268

이 침실의 오분의 일도 안 되는 고시원의 내 방이 떠올랐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방, 퀴퀴한 냄새. 그러나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수컷들이 우울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내 옆에 누워 있는 이 멋진 여자를 감당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국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있는 남자에게 갈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그러니까 칼리 피오리나 같은 여성도 무능한 남자를 배필로 맞지는 않는다. 유능하고 멋진 여성 역시 자기보다 더 유능하고 멋진 남성을 원한다. 그러니까 직업이 없는 무능한 남성에게는 미래가 없다. 혹시 게이라면 모를까. 만약 게이라면 현실의 남녀관계보다 훨씬 동등한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도 묶여 있지 않고 주변의 기대니 억압이니 하는 것도 없다. 아, 그러나 나는 게이가 아니라 지원과 같은 여성을 사랑하는 무능한 스트레이트, 성적 소수자인 게이보다도 더 비극적인 운명이라니.
"무슨 생각해?"
"내 머릿속에 잘못된 회로가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결국은 똑같은 곳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아."
"그게 뭔데?"
"내 현실, 결국 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 뭐 그런 것 있잖아."
- P275

나는 옆방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을 때 손잡이에 질질 끌려왔을 그녀의 몸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그 어떤 강렬한 죽음의 의지가 한 인간을 거기까지 몰아붙인 걸까? 석고보드로 마감한 고시원의 벽에는 인간의 무거운 육신을 매달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결국 방문 손잡이에 줄을 고정하고 단단히 매듭을 지은 후, 그 속에 자신의 목을 집어넣고는 숨이 멎을 때까지 조른 걸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집요했던 걸까?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 P2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인들의 죽음

우리는 가벼운 향기로 가득 찬 침대
무덤처럼 움푹한 쿠션을 마련하리라.
우릴 위하여 더욱 아름다운 하늘 밑에
피는 신기한 꽃들도 장식선반 위에 꽂으리.

우리 둘의 심장은 다투어 마지막 열을
다하여 타는 두 개의 거대한 횃불이 되어,
쌍거울 같은 우리 두 정신 속에
그 이중의 빛을 반영하리라.

장미빛과 신비론 푸름의 어느날 밤에,
우리는 긴 흐느낌 처럼 이별의 정 가득한
단 한 번의 번갯불을 주고받으리.

그 후 <천사>가 문을 방긋이 열고
들어와 충실하고도 즐거운 기색으로
흐린 거울과 죽은 불길을 되살려주리라.
- P104

흡혈귀

신음하는 내 가슴에
비수의 일격처럼 박힌 너.
마귀떼처럼 억센 것이,
치장하고 지랄스럽게 와서,

욕된 내 정신을 네 잠자리
네 영지로 만드는 너.
- 중죄수가 사슬에 매이듯이
내가 매어 있는 더러운 계집아,

끈질긴 도박꾼이 도박에 매이듯,
술주정뱅이 술병에 매이듯,
구더기에 썩을 짐승 시체가 매이듯,
-망할 년, 망할 년아!

날쌘 검의 일격이 내 자유를
전취해 주도록 나는 빌었고,
믿지 못할 독약에게 내 비겁함을
구해달라고 나는 말했지.

오호라! 독약과 검은
나를 멸시하여 말했어-
「저주받은 노예생활에서
널 끌어낼 보람도 없어,

「머저리야!
- 만약 우리 애써
널 그년 질곡에서 해방시킨다면,
네 입맞춤으로 네 흡혈귀의
송장을 되살려놓을 게다!」 - P59

흡혈귀의 변신
이때 여인은 숯불 위의 뱀처럼
몸을 비비꼬고, 코르셋 철골 위에
유방을 짓이기며, 딸기 같은 붉은 입으로
흠뻑 사향 배인 말을 흘려보냈다.
-「나로 말하자면, 젖은 입술로 침대 속에서
옛 시대의 양심을 잃게 하는 비의를 알고 있어.
내 압도적인 유방 위에선 어떤 눈물도 말려주고,
늙은이들도 어린애같이 웃게 해요.
홀랑 벗은 내 알몸을 보는 이에겐
달이 되고, 태양, 하늘, 별이 되어주지!
귀여운 학자님, 나는 하도 관능에 통달해서,
무서운 팔 안에 사내를 꽉 껴안을 때,
혹은 소심하고도 음란하며 여리고도 억센 내가
내 윗도리를 깨무는 대로 내맡길 때면,
넋을 잃는 이 육체의 깔포단 위에선
정력 잃은 천사들도 지옥에라도 떨어질 지경!>
그녀가 내 뼈마다 온통 골수를 빨아내고,
내가 사랑의 키스를 돌려주려 나른한 몸을
그녀 쪽으로 돌렸을 때, 눈에 띈 것은
오직 고름으로 꽉찬 끈적끈적한 가죽푸대뿐!
등골이 오싹하여 두 눈 딱 감았다가
환한 불빛 속에 다시 떴을 땐,
내 곁에 피로 꽉 채운 듯한 억센
마네킹 같은 여체는 간 곳 없고,
해골 조각들이 뒤섞여 떨고 있었으니,
그 소리 풍향침의 삐거덕 소린가,
아니면, 쇠막대기 끝에서 겨울밤 동안
바람에 흔들리려 간판이 울리는 소린가.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

나는 점주의 말투보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더 충격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한 인간을 서서히 파멸시키고 싶다면 그런 눈빛을 배워야한다. 그것은 상대가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눈빛이며, 앞으로 그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눈빛이며, 혹시 그런 존재가 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는 눈빛이다. 만약 그런 눈빛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다면 그 삶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런눈빛을 가진 교사 밑에서 배우는 아이라면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경멸과는 또다른 것이다. 그것은 경멸에 들어가는 에너지조차 아까워하는, 얕은 수준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필요하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을 때나 생겨나는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내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 살고 있는 영혼의 파수꾼이 출동했다. 나는 그가 나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 P109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 P163

이디스 워튼이라는 미국 여성작가, 혹시 알아? ㅎㅎ 답을 찾으려 머리를 막 굴리는 네 모습이 벌써 보이는 것 같아. 그래, 맞아. 『순수의 시대」 쓴 사람, 그 사람의 소설에 이런 말이 나와.
"여자라는 존재는 방으로 가득한 저택 같은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가 있고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도 있고 가족들이 함께하는 거실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들 너머에는 전혀 다른 방들이 있답니다. 누구도 문고리조차 잡아보지 않은, 아예 그런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안다 해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방들,
그리고 그 방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방, 신성하고 신성한 그곳에 영혼이 홀로 앉아 끝내 오지 않을 어떤 발자국을 기다리는 것, 그게 바로 여자의 본성이에요."
나는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해. 나 역시 내 마음 깊은 곳에 무슨 방들이 있는지 잘 몰라.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과연 그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을 알아볼 수는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를 깊은방에 앉아서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
- P183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많은 게 함께 따라오는 것 같다. 장소도 그중 하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장소와 만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 P201

그런데 이런 지극한 행복의 순간에도 인간의 상상력은 어느새 최악의 파국에 가 닿는다. 내게 찾아온 이 행복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혹시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꾸민,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가장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하려는 사악한 계략이라 생각하는 편집증까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비록 그 싹은 아직 크지 않을지라도, 마음속 깊숙한 어딘가에서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누군가로부터 깊이 사랑받지 못한 자의 숙명적인 어리석음일수도 있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 역시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날 내가 느낀 열락감, 그 지고의 행복감이 나의 노력과는 무관한 일종의 행운이라는 것도 그런 심사를 부추겼을 것이다.
사랑이 어찌 노력과 재능으로 되랴? 그것은 정말 운명이거나 우연인 것이다. 정말 딜레마이다. 사랑의 기쁨은 그 예기치 않음에서 오는데,
정작 그 예기치 않음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사업의 성공이나 고시 합격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두 연인이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오직 그들만의 것이므로 그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위태로워진다. 증명서도 공인된 형식도 없다. 그날 코엑스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마치 날달걀을 던지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들의 기쁨은 휘발되고 날카로운 고통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걸까?
증인을 세우고 공인된 형식을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간직하던 그 짧고 황홀하고 위태로운 기쁨을 진부하고 안락하고 견고한 제도로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마치 믿을 수 없이 많은 돈을 딴 도박사가 카지노의 칩을 현금으로 바꾸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 P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