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잔인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남이 죽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겁니다. 퀴즈쇼는 로마 시대의 검투 같은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고, 사람들은 그걸 보며 안도하는 겁니다. 자기 대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이죠." 나는 토를 달았다. "진짜 죽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도 나는 퀴즈쇼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탈락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안도했던 것일까? 이춘성이 말을 이었다. "그렇죠. 진짜 죽는 것은 아니죠. 그들은 다시 부활합니다. 부활한 참가자들은 멋쩍게 웃으면서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는 식으로 말들을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맞히지 못했을 때의 그 끔찍한 표정 말입니다. 부끄러움과 절박함이 뒤섞인, 어떻게든 이 문제를 맞히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평소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얼굴 근육까지 다 써가면서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싸울 때의 표정을 말입니다. 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엔 마치 임사체험을 한 등반가들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 가족들의 모습, 즐거웠던 기억과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순간 모든 것을 초탈하게 됩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꽉 붙들고 있던 정신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저 아래로 떨어지는 거지요. 그래도 잘했어.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최선을 다했으니 만족해. 이런 생각들이 지나가면서 뇌를 이완시킵니다. 최고조로 치닫던 긴장을 한순간에 누그러뜨리는 인체의 신비랄까요. 혹시 추락을 경험한 등반가들에 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라인홀트 메스너 같은 사람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읽어보셨군요." "아니요. 그냥 이름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자기 할말만 계속했다. "극도의 긴장 뒤에 찾아오는 편안한 순간,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을 위해 신이 예비해놓은 마지막 축복입니다.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분수처럼 뇌를 적시며 고통을 줄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추락이 가장 편안한 죽음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 P235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아무리 대단한 영화도, 그 어떤 기상천외한 롤러코스터도 그것에 필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냄새가 있고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역사가 있다. 무엇보다 그 방은 삼차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나는뚜벅뚜벅 그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물건들은 만져볼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면 슬쩍 가져갈 수도 있다. 천장은 그녀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처음으로 보는 바로 그 천장이며 침대는 그녀가 자신의 온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바로 그 침대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서 우리는 얼마간 탐정이고, 또 얼마간은 변태이며, 그리고 또 얼마간은 수집가다. 방은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단서들로 가득하며 그것들은 나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서들은 하나같이 매혹적이다. 인기가수의 팬들이 아수라장을 틈타 그의 땀이 묻은 선글라스를 낚아채듯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손댄 그 어떤 것을 내 소유로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 P260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이런 모험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무의미하지 않을까?" 나, 실은 이 말이 너무 좋았어. 너는 영혼, 모험 그리고 의미라는 말을 한 문장 안에 사용하고 있어. 나는 그게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을 인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나는 사람이 두 종류라고 생각해,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게 얇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않아. 현실만이 그들의 신앙이고 종교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가차없고 냉혹해. 물론 그런 사람들이 편할 때도 있지. 자기보다 강하고 부유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교를 쌓는 건 너무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든가,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득이 되나, 같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이야. 너는 무용한 걸 좋아하잖아. 지식, 퀴즈, 소설 같은 것들 말야." - P268
이 침실의 오분의 일도 안 되는 고시원의 내 방이 떠올랐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방, 퀴퀴한 냄새. 그러나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수컷들이 우울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내 옆에 누워 있는 이 멋진 여자를 감당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국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있는 남자에게 갈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은, 그러니까 칼리 피오리나 같은 여성도 무능한 남자를 배필로 맞지는 않는다. 유능하고 멋진 여성 역시 자기보다 더 유능하고 멋진 남성을 원한다. 그러니까 직업이 없는 무능한 남성에게는 미래가 없다. 혹시 게이라면 모를까. 만약 게이라면 현실의 남녀관계보다 훨씬 동등한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도 묶여 있지 않고 주변의 기대니 억압이니 하는 것도 없다. 아, 그러나 나는 게이가 아니라 지원과 같은 여성을 사랑하는 무능한 스트레이트, 성적 소수자인 게이보다도 더 비극적인 운명이라니. "무슨 생각해?" "내 머릿속에 잘못된 회로가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결국은 똑같은 곳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아." "그게 뭔데?" "내 현실, 결국 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 뭐 그런 것 있잖아." - P275
나는 옆방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을 때 손잡이에 질질 끌려왔을 그녀의 몸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그 어떤 강렬한 죽음의 의지가 한 인간을 거기까지 몰아붙인 걸까? 석고보드로 마감한 고시원의 벽에는 인간의 무거운 육신을 매달 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결국 방문 손잡이에 줄을 고정하고 단단히 매듭을 지은 후, 그 속에 자신의 목을 집어넣고는 숨이 멎을 때까지 조른 걸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집요했던 걸까?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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