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인류가 정기적인 명상을 시작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와 전지구적 조화가 도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신에 관한 진실을 관찰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어렵다! 대부분의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쪽으로 노력하게 한다 해도 우리 중 다수는 우리가 맞닥뜨리는진실을 재빨리 영웅과 악당, 적 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왜곡하고다. 그러고는 전쟁을 일으킬 정말 그럴싸한 명분을 찾아낸다.
4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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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핵심 경전인 《마하사티파타나 숫타>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도자가 명상할 때는 자신의 몸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친다. 머리카락이나 뼈, 오줌은 다른 무엇을 상징하는것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경전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수도자에게 자신의 몸이나 마음에서 무엇을 관찰하든지 단지 있는 그대로 이해하라고 설법한다. 그래. 수도자는 숨을 쉬면서도 "깊게 숨을 쉴 때는 그에 맞게 ‘나는 깊은 숨을 쉬고 있다‘라고 이해하고, 얕게 숨 쉴 때는 그에 맞게 나는 얕은 숨을 쉬고 있다‘라고 이해한다" 긴 숨이 계절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짧은 숨이 하루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그저 몸속의 떨림일 뿐이다.
부처는 우주의 세 가지 기본 현실을 설파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지속적인 본질이란 없으며,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우리는 몸과 마음, 은하계의 가장 먼 곳까지 탐사할 수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본질을 지닌 것,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킬 것은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어떤 영원한 본질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서 연결만 하면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영원한 본질을 때로는 신이라 부르고, 때로는 국가, 때로는 영혼, 때로는 진정한 자아, 때로는 진실한 사랑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예정된 실패에 따른 실망과 참담함도 커진다. 설상가상, 집착이 크면 클수록 그런 사람이 염원하는 목표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개인과 집단, 제도를 향한 증오심도 커진다.
부처에 따르면, 생에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만들 필요도 없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과 공허한 현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하는 고통에서 해방되면 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람들의 물음에 부처는 이렇게 조언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절대로 아무것도." 모든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는 데 있다.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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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난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그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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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인은 자신의 약한 종교적 감정을 강화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가기로 결심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어떤 사람은 무신론자로 남아서도 더없이 행복하게 사는데,
어떤 사람은 굳이 더 종교적인 사람이 되려고 열망할까? 이것은 그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 유전적 성향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결코 자유 의지‘의 결과는 아니다.
성적 욕망에 대해서 참인 말은 모든 욕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실로 모든 느낌과 생각에도 해당된다. 지금 당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음 생각을 헤아려보라. 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당신이 자유롭게 그것을 생각하기로 선택하고, 그런 다음에야 그것을 생각했나? 분명히 아니다. 자기 탐색의 과정은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 갈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처음에는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단계는 쉽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은 더 어렵다. 궁극에는 우리의 욕.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느낌, 욕망에 덜 집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 의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의지의 폭정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간은 보통 자신의 욕망에 너무나 큰 중요성을 부여한 나머지 이 욕망에 따라 온 세상을 지배하고 조성하려 애쓴다. 자신의 열망을 추구하느라 달에도 날아가고,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전 생태계까지 불안정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인 과정(여기에는 문화적 요인들도 영항을 미치지만 이 역시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다)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덜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상이라면,
무엇이든 실현하려 애쓰기보다 자기 자신과 정신, 그리고 욕망을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디뎌야 할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 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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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역사를 보더라도 거의 모든 인간은 동시에 몇 가지 이야기를 믿었으며, 어느 한 이야기의 진실만 절대적으로 확신한 적은 없었다. 이 불확실성은 대부분의 종교를 덜컥거리게했다. 이에 따라 종교는 신앙을 핵심 덕목으로, 의심을 최악의 죄악중 하나로 간주했다. 마치 어떤 것을 증거도 없이 믿는 데에 본질적으로 선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여겼다. 하지만 근대 문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신앙은 점점 정신적 노예처럼 보였고, 의심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비치게 되었다.
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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