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힘

숫자는 단지 그 형태만으로도 생명이 진화해 온 역사를 보여 준다. 숫자들에 나타나는 둥근 형태는 사랑과 해방을 의미하고, 곧은 줄은 집착과 구속을 뜻하며, 엇갈린 형태는 시험과 이행을 가리킨다. 숫자들을 하나씩 들어 가며 거기에 담긴 뜻을 살펴보자.

0은 공백의 단계이다. 이 숫자는 동그라미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생명을 품은 태초의 알이다.

1은 광물의 단계이다. 이 숫자는 세로줄 하나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부동성과 시작을 뜻한다. 이 단계에서 사물은 그냥 존재한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의식의 첫 단계다. 광물은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다.

2는 식물의 단계이다. 이 숫자는 밑부분이 곧은 줄로 되어 있다. 이는 식물이 땅에 붙박여 있음과 같다. 식물은 땅에 속박되어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이 숫자의 윗부분은 둥글다. 이는 식물이 하늘과 빛을 사랑하는 것과 통한다. 식물은 하늘과 빛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위해 자기 윗부분에 있는 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3은 동물의 단계이다. 이 숫자에는 곧은 줄이 없다. 이는 동물이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음과 상통한다. 이 숫자에는 두 개의 고리가 있다. 이는 동물이 위쪽과 아래쪽을 사랑하고 있음을 뜻한다. 동물은 하늘의 노예도 땅의 노예도 아니며, 자기의 감정과 욕구에 따라 행동한다. 동물은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지 않기도 한다. 이기주의는 동물의 주요한 특성이다. 동물은 포식자가 되기도 하고 먹이가 되기도 한다. 동물은 언제나 두려움을 지닌 채 살아간다. 자기의 직접적인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동물은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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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지 벌써 1세기가 넘었습니다. 우리는 명예를 걸고 선서하지 성서에 두고 맹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서가 누구에게나 다 성스러운 책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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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재판

예로부터 사람들은 동물을 사람의 법으로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프랑스에서는 10세기부터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며 당나귀나 말이나 돼지 따위를 고문하고 교살하고 파문하였다. 1120년, 랑의 주교와 발랑스의 부주교는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나방의 애벌레들과 들쥐들을 파문하였다. 부르고뉴 지방 사비뉴이 쉬르 에탕의 고문서 중에는 한 암퇘지에 대한 재판 기록이 들어 있다. 그 암퇘지는 다섯 살 난 아이를 잡아먹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증거는 충분했다. 그 암퇘지가 새끼 여섯 마리와 함께 주둥이에 피칠갑을 한 채 범죄 현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돼지들은 정말로 아이를 잡아먹었을까? 재판을 통해 사형이 확정된 어미는 공공장소에서 뒷다리로 매달린 채 죽음을 맞았다. 한편, 새끼 돼지들은 한 농부에게 맡겨져 보호와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 새끼 돼지들은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계속 자라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결국 어미 돼지가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정상적으로〉 도살되었다.

1474년, 스위스의 바젤에서는 한 암탉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 암탉은 노른자위가 없는 알을 낳은 것 때문에 마귀가 씌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암탉의 변호인은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그 변호의 보람도 없이 암탉은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1710년이 되어서야, 한 연구자가 노른자 없는 알을 낳는 것은 어떤 병의 결과임을 알아냈다. 그러나 소송 당사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라, 그 사건에 대한 재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1519년에 한 농부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 두더지 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두더지들의 변호인은 언변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두더지들이 너무 어려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두더지는 농작물을 해치는 곤충들을 잡아먹기 때문에 농부에게 유익하다고 강변하였다. 결국 두더지들에게 내려졌던 사형 선고는 소송인의 밭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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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라는 수

영(零)은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산술이나(점으로 표기) 그보다 훨씬 앞선 마야인들의 문명에서(나선으로 표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영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7세기에 페르시아인들은 인도인들의 영을 모방했다. 몇 세기 후에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그 수를 빌려 왔고 그것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을 붙였다.(아랍 말로 시파는 〈비어 있음〉을 뜻한다). 유럽에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의 소개로 영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피보나치(필리오 디 보나치를 줄여 부르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피사의 레오나르도라고도 불렀는데, 그 별명과는 달리 베네치아의 상인이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의 개념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영이 기존의 몇몇 개념에 수정을 가한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교회는 영이 너무 많은 개념들을 뒤엎는다고 판단했다. 영이 악마적이라고 생각하는 종교 재판관들마저 있었다. 사실, 어떤 수와 곱하든 그 수를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영은 사탄의 수라는 오해를 받을 법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교회는 영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회계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영을 사용하는 아주 〈물질주의적인〉 이점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영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다른 수에 붙이면 그 수를 열 배로 만들 수 있었다. 영을 덧붙임으로써 계량 단위의 변화를 장황하게 표시하지 않고도, 십·백·천·만의 계수를 얻게 되었다.

영은 아무 가치가 없는 수로서, 다른 수의 오른쪽으로 가져가면 어마어마한 힘을 주고, 왼쪽으로 가져가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영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릴 수 있는 위대한 수이다. 영이라는 마법의 문이 있기에 우리는 뒤집어진 평행 세계, 즉 음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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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주 굳게 믿으면, 상상적인 것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야. 자네들은 이 장치로 사람들도 완전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 거야. 따지고 보면, 종교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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