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거친 바다 위를 표류하며 전우들을 모두 잃고, 숱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장 깊은 절망의 심연에 내던져졌을 때, 그는 하늘을 향해 자비를 구걸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묵묵히 다짐한다.
"참아라, 나의 마음이여.
너는 언젠가 이보다 더 끔찍한 일도 견뎌내지 않았던가."
살다보니 절망의 순간을 마주한다. 숨이 턱턱 막힌다. 무엇이 문제였지하는 자책감과 함께, 문제의 늪이 더 크게 짓누른다. 한편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희망도 있지만 어떻게 이 위기를 벋어나야 할지 모르겠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 신을 찾게 된다. 자비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때는 더 심각한 상황도 이겨냈지 않느냐 하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참으로 산 넘어 산이다. 큰 산을 넘어 왔기에 이젠 어떤 산도 넉넉히 넘을 수 있고, 나를 괴롭힐 산이 없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큰 산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또 큰 산맥이 나를 가로 막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 앞에 처절히 무력해지는 모습에서, 이젠 어떡하라는 말입니까하며 누군가(신?)에게 하소연을 흘려 보낸다.
어쩌면 인간은 신들의 폭풍 속에서 노를 젓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 것을 알게 된다. 삶을 흔드는 무게가 하늘만큼 커보여도 이제는 세상을 원망하거나, 나 자신을 학대하거나 또는 신의 변덕에 분노하거나, 나의 무능을 저주하는 일은 집어 치워야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망할 시간에 다음 파도를 넘을 준비를 해야한다. 이것이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가르침이다.
거대한 운명의 격량 앞에 그가 가진 지혜나 기도조차 무력했다고 한다. 그렇다. 세계는 정의로운 보상을 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 반드시 부러진다.
"왜 나만 이런가, 왜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이 모양인가, 반대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가는가." 억울함에 매몰되어 과거만 파고드는 따위는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만 파고들면 손에 쥔 노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법이다.
그렇다. 이 책은 낭만적인 위안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화두를 던진다. 그건 당신의 이타카(Ithaca-오디세우스의 고향이자 그리스의 섬 이름, 문학적·상징적으로는 ‘귀향’이나 ‘목표’를 의미하는 용어)는 어디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로 돌아가려 하는가? 아니, 그 전에 돌아갈 곳이 있기는 한가하며 내가 가야할 종착지가 어딘지를 묻는다.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괴물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십년 동안 방향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타카는 낙원이 아니었다. 작고, 척박하고, 돌 많은 섬이었다. 그래서 신들은 화려한 대안을 제시했다. 칼립소는 불멸을 주겠다고 했고, 키르테는 그를 왕처럼 환대했다. 그러나 파이아케스인들은 그를 붙잡거나 새로운 삶을 권한 것이 아니라, 이타카로 돌아갈 배와 선물을 마련해 주었다. 오디세우스는 그 도움을 받아 마침내 고향으로 향했는데, 여기에 대해 프롤로그를 쓴 편집부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가 거절한 것은 귀환을 대신할 영원한 안락이었고, 그가 받아들인 것은 귀환을 가능하게 하는 타인의 환대였다.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초라해도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여기서 한 번 멈춰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초라한 이타카를 부끄러워하며 남의 화려한 섬에 눌러앉으려 하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삶은 타인의 의해 주어지고 만들어진 안락한 삶이 아닌 폭풍 속을 걷지만, 되는 일이 없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나 자신이 경험하고 부딪힌 삶만이 오로지 나의 이타카가 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전작 『일리아스』가 전쟁터에서의 영웅적 죽음과 명예를 다루었다면, 이 책 『오디세이아』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는 삶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특히 신의 뜻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황하면서도 정체성을 찾아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지금의 불확실한 시대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천년 전에도 거친 바다를 향해 했고, 지금도 동일하게 인간은 가혹한 폭풍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불명의 생을 주겠다는 칼립소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 필멸의 인간으로서 고통과 늙음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돌아간 자리는 그를 더 혹독하게 다루어 그곳이 그의 무덤이 될 수 있는 자리였다. 돌아간 이타카는 사실 폐허에 가까웠다. 왕궁은 구혼자들에게 점령당했고, 아내는 지쳐 있었다. 아들은 낯설었고, 자신은 다 늙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타카로 돌아갔다. 이타카가 좋은 곳이라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남의 낙원보다 내 폐허가 낫다.
낭만적인 문장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러하다. 화려하게 지어진 타인의 집보다, 허술한 집이지만 가족이 있고, 내 삶의 흔적이 있었던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이다. 한때 미국 이민 갔던 자들이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웠을 때 미국 문화의 화려함 속에서 살기보다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나는 쓰러져 가는 고향 집, 들 길을 찾아 오듯이 우리는 우리가 끝내 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책은 다섯 겹의 항해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 째는 고난을 수용하는 법. 두 번째는 유혹을 경계하는 법. 세 번째는 희생을 감수하는 법. 네 번째는 심연을 응시하는 법. 다섯 번째는 이타카를 탈환하는 법에 대해 다룬다. 각 장마다 주는 깨달음과 삶에 대한 선명함이 주어질 것이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가혹한 운명을 마주해 보자.
이 책에는 신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포세이돈, 아테나, 제우스, 헤르메스 등의 이름이다. 여기서 신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이름으로서 신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 신들을 이기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은 이 길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이길 수 없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 손으로 노를 잡는다는 사실 그 자체다.
한 자료를 보았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평생 붙들고 있었던 질문이 있는데 그건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이다. 그가 도달한 답은 단순했다. 자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자만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서사적 정체성’이라 불렀는데 결국 오디세우스를 읽은 자는 오디세우스가 살아간 삶의 궤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나만의 항해, 즉 나만의 오디세우스를 펼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신들은 각자마다의 가혹한 운명을 만든다. 그러니 그것을 대하는 자세 또한 각자의 선택이다.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을 보고 끌려 가지 말고, 내 안에서 요구하는 욕망을 따라 오늘도 한 발자국을 내딛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 실어본다.
"신(神)은 불쌍한 자를 돕지 않는다, 오직 '닮은 자'에게 투자할 뿐이다."
"신들이 인간에게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부여한 것은,
훗날 태어날 이들에게 불릴
노래를 만들기 위함이다.
-호메로스 『오디세이아』中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