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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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제가 지금껏 가본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추한 나라입니다. 가장 놀랍고 현대적인 산업주의를 발전시켰지만 가장 유기적이고 목가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고요. 모든 나라를 통틀어 가장 민주적인 동시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구시대적인 귀족주의의 잔재를 숭상합니다.

-본문 중-

차페크의 여행기를 보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여행 산문집임을 보게 된다. 기억에 나는 여행 산문집은 단연 헤르만 헤세다. 그가 쓴 글을 읽고는 다른 여행자들의 책은 그냥 가벼운 일기장처럼 보였다. 헤세의 여행기는 뭐랄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자기 내면과 대면하는 공간이자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의 글과 묘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사유의 길로 이끈다. 그런데 그것과 버금가는 여행기가 차페크 책에서 발견되다니…

이 책 한 권을 통해 그의 모든 책이 궁금해졌다. 요즘 ‘한 강’이라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서점과는 온통 그에 관한 책들과 그가 언급한 시시코콜한 얘기도 이슈화된다. 심지어 그의 부친의 책이 판매가 무려 7배 정도 판매 되었다고 하니 한 강의 인기가 이만저만 아니다. 차페크 역시 뛰어난 문학가임에는 틀림 없다. 그를 두고 언급되는 말 중에 체코 출신 가운데 위대한 작가들인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그의 이름도 같은 반열에 손꼽히는 인물로 알려졌다.

여행에 대한 열망은 이제 한국인에게도 바람불듯 찾아왔다. 내 어린 시절이나 2-30대 시절만 하더라도 이런 낭만적인 삶에 대해서는 꿈도 못꾸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말마다, 공휴일마자, 명절마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 여행다니기 바쁘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기는 그저 사진을 찍고, 바쁘게 블로그와 SNS를 올리며, 꼭 가야 할 명소와 맛집 리스트를 알리면서 나라는 존재를 알리는데 주력을 한다. 그런데 진정한 여행기는 이런 소비적이며, 과시적인 것이 아니다. 여행은 사유를 위해 떠나는 것이며, 낯선 세상에서 자신을 마주하며, 영혼을 깊이 파는 갈구여야 한다. 그저 떠나서 고기 구워 먹고 오고, 캠핑 도구를 자랑삼아 찍어 올리고, 꾸미며 보여주기에 바쁜 우리의 여행은 일단 한 수가 낮은 여행이다. 여행은 유명한 관광지를 시간에 쫓겨 급급하게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한 곳이라도 그곳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며, 풍경과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면에서 카렐 차페크가 영국을 밟으며 짬을 내며 보여주는 글은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여행의 목적과 산책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채근하듯 알려준다.


일단 전체적으로 느낀점은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영국을 대놓고 다정하게 보지 않고 언제나 낯선 타자로서 무언가를 꼬집고 객관화시키면서 이상한 사람들인 것처럼 만들지만 그러나 곳곳에 영국인의 위상과 그들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에 놀라며 동경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제가 보기에 영국은 사람들조차도 아름답고 위엄있게 늙어가는 비결을 알고 있는 나라인 듯합니다.

-영국인들에게-

유년 시절 그가 영국인을 아는 유형은 두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정치 풍자만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그려진 승마 부츠와 반바지 차림을 한 퉁퉁하고 혈색 좋은 사내가 대게 블도그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유형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이른바 스미스 씨 유형으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체크무늬 옷을 입고 붉은 수염을 기르며, 틈만 나면 탁자 위에 발을 올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영국에 도착했을 때 대다수 영국인이 체크무늬 옷을 입지도 않았고, 수염도 기르지 않았으며, 탁자에 발을 올리지도 않았고, 눈에 띄게 키가 크거나 퉁퉁한 사람이 없어 실망하였다고 한다. 유년의 환상이 실제를 마주할 때 와장창 깨어져 버렸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선 나라에 대해 TV를 통해서나 책을 통해서나 조금 아는 것이다. 실제 그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분명 그 나라의 땅을 딛고, 그 나라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페크는 영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이렇게 소개한다.

"전반적으로 영국제도의 주민들은 외국인들이 보기에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합니다. 영국처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라는 드물 겁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영국에 직접 가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국인들의 풍습과 절제된 배려, 예절과 간소함, 다른 수십가지 영국적인 삶의 특성에 반하고 말 테니까요." p.196

그러나 차페크는 제목 그대로 대놓고 다정하지 않게 영국을 여전히 바라보며 이렇게 영국을 슬쩍 깐다.

"분명한 사실은 이미 땅으로 다닐 수 없다는 겁니다. 현대 문명의 눈부신 성과죠. 작은 그림을 그려 보았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공장처럼 요란한 소음이 더해져 훨씬 더 지독하게 느껴진답니다. 하지만 운전사들이 미친듯이 경적을 울려대지도, 사람들이 서로에게 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어쨎든 이곳 사람들은 조용한 사람들이잖아요." p.31

"영국 신사는 간단하게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클럽의 웨이터나 기차역의 매표원, 하다못해 경찰관이라도 사귀어봐야 합니다. 과묵함과 호의, 위엄, 스포츠, 신문, 예절 등이 절제된 형태로 융합된 모양새라고 할까요?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신사가 두 시간 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속이 부글부글 끓을 겁니다. 하지만 짐을 내리려 할 때 손이 닿지 않아서 낑낑 대면 그 신사가 불쑥 일어나 가방을 내려주죠. 이곳 사람 들은 언제든 기꺼이 서로를 돕지만 날씨 얘기 말고는 이렇다 할 대화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놀이나 경기를 고안한 게 아닐까 싶네요, 놀이나 경기를 하는 동안에는 서로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워낙 과묵하다보니 공공장소에서도 정부나 기차, 세금 따위에 대해 욕을 퍼붓지 않습니다. 영국인은 대체로 재미없고 조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함께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술집 대신 선 채로 술을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를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로이드조지처럼 정계로 나가거나 작가가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책들은 400쪽을 가뿐히 넘어가죠."

p.171-172

"마지막으로 몇 가지 나쁜 점을 폭로할까 합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일요일이 지독하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시골로 떠나기 위해 일요일이 있는 거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시골로 떠나는 건 영국의 일요일이 끔찍하게 두려워서입니다. 모든 영국인은 토요일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픈 우울한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 도망칠 수 없는 이들은 하다못해 기도와 노래로 이 끔찍한 하루를 견디기 위해 예배당으로 향합니다. 일요일에는 아무도 요리하거나 돌아다니거나 구경하거나 사색하지 않습니다. 대체 영국이 어떤 말 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느님이 일요일마다 이런 벌을 내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p.182

차페크가 영국이라는 도시를 보는 시선은 이렇듯 문학가 기질이 다분히 드러난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들의 삶이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차페크는 이 책에서 잉글랜드부터 스코틀랜드, 북웨일스, 아일랜드까지 영국 여행기를 지루함과 떠들썩함, 인공과 자연, 부와 빈곤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영국의 면면을 시니컬하면서 유머러스하게 파헤친다. 자신들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문명의 발전 속에 숨 막힐 듯 복닥거리는 런던의 거리와 정체가 일상인 도로를 보았을 때 차페크는 인간성의 말살을 눈물겹게 걱정하였다. 그리고 우울할 정도로 지루한 일요일을 견디기 위해 정처 없이 걷는 중에 하이드 파크 앞에서 마주친 잔디와 공원의 아름다움, 그리고 다양한 연설자들이 흥미로울 만큼 마음대로 각자가 가진 의견을 내뱉는 열정에 차페크는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현대인의 여행은, 특히 한국인의 여행은 ‘관광지 도장깨기 여행’을 지향하며, 어딘가 다녀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여행이란 유튜버들이 관광지를 소개하고,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그런 류의 소비적 여행이 아니다. 한 번은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이라는 책을 보았다. 헤세의 여행 스케치가 기록된 책이다. 헤세는 여행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여행의 서정은 일상의 단조로움, 일과 스트레스를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데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교제에 있지 않으며, 색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호기심의 충족에 있는것도 아니다. 여행의 서정은 경험에 있다. 그것은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것, 새로운 획득물을 내 안에 유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양성 속의 조화를 이해하고 대지와 인류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해하는 것, 옛 진리와 법칙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 안에서 재발견는데 있다.” - P.61

그렇다. 차페크의 여행 에세이는 영국이라는 그 당시 사회를 매우 치밀하면서도 위트있게 그려준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차페크의 마음에는 영국을 향한 시기어린 마음에 영국을 비판적 시선으로 많이 보지 않았나 싶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체코와는 별개의 나라이다. 어쩌면 놀라움을 금치 못해 낯선 타인으로서 계속 그들을 살폈는데 그러나 그들 안에도 삶이 있었고, 그들만의 인생이 있었음을 보게된 것이다. 즉 대놓고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동경하는 마음으로 칼럼을 쓴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 책을 평가하는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이 책이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여행기이지만 “중유럽 문화의 기록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을 했다. 아울러 가벼우면서도 온화하며 어떠한 선동의 의도도 없는 이 책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안하고 힘든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인간성을 잃지 않는 법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행을 할 때 어떠한 자세와 마음으로 해야하는 지를 이 책을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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