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무엇으로 그것을 믿는가?”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公義)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다.”
이 대화만해도 가슴 벅찬데 그 다음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서 대단히 지적이며 논리적이며 상대 나라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도산의 인품을 보게 된다.
“그대는 일본의 실력을 모르는가?”
“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다.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가지기를 동양인의 명예를 위하여서 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대한 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하는 것보다 우정 있는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신문하던 일본 검사의 말문이 그만 여기서 턱 막혀버렸다고 하니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고 대범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 ‘밥을 먹어도 독립, 잠을 자도 독립’ 중에서 P. 17-18
배움의 열정
그리고 도산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이 책을 통해 보게 되었다. 필대은이라는 세 살 위 서당 선배를 통해 국제정세와 서양의 각종 문물에 대한 소개를 받는 가운데 세상을 보는 안목이 크게 넓혀지면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외국 군대에 의한 전쟁, 약탈, 방화 등으로 우리 백성이 고통 당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도산은 우리 민족의 비참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서구 학문을 배우고 문물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거기서 언더우드 학당에 들어가 안창호는 서구 문화와 신학문을 배우며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접장(接長 규모가 큰 서당에서의 학생의 장)으로 있던 송순명의 전도로 학교 규칙에 따라 밀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는데 이것이 도산에게는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선배 필대은을 데려와 세례를 받게 하고 기독교적 세계관 공부를 하도록 했는데 필대은이 이런 말을 하며 기독교인이 어떤 자여야 하는 지를 알려 준다. “우리가 머리를 깎고 예수를 믿는데, 머리를 깎은 바에는 모든 것을 좀 깨끗이 해야지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 다른 사람한테서 예수 믿는 사람이 더럽다고 욕을 먹을 것입니다.” p.30
1919년 3․1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한 일은 물론 신앙적으로도 모본이 되는 존재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다.
공부보다 동포가 먼저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 외에도 교육과 계몽 활동에 많은 힘을 쏟았으며 또한 청년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실력 양성 운동을 펼쳤다. 이런 신념은 교육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그 신념을 바탕으로 흥사단, 대성학교, 신민회 등의 활동을 하며 조직을 구성해 나갔다. 그래서 도산은 유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고자 하였다. 처음 그는 동포를 도우기 위해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해 수술을 집도할 자신이 없어 교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렇게 도산은 유학의 부푼 꿈을 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날라 갔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차이타타운에서 셋방을 얻어 생활 했는데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20여 가구의 한국인이 살았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이 미국 사회에 문제를 일으켰다. 서로 이질적인 여건과 환경 때문에 감정적 다툼이 잦았고,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 거친 행동과 말투, 불결한 거처와 생활 태도 등은 미국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고 멸시당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동포의 현실을 보고는 계획 했던 공부를 미루고 동포의 노동 주선과 생활 태도를 고쳐 스스로 문명 국민이요 독립할 국민임을 주변 미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을 하였다. 개인의 공부보다는 동포의 생활 개선과 단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영달을 위하지 않고 동포를 위해 기꺼이 꿈을 접는 모습은 가히 독립운동가들이 가진 고매한 인격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도산은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면서 한인 노동자에게 이런 말로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냈다. 즉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하면 농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어 돈을 벌 수 있고,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는 자금도 마련할 수 있으므로 애국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동포의 마음에 스며들었는지 한인 노동자는 근면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변해 갔고 농장 주인에게 칭찬과 신임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미래 보다 나라의 미래, 동포의 앞날을 생각하는 그 모습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평생 동지이며 후원자 이강
책에는 도산을 도운 훌륭한 동역자인 독립운동가가 많이 거론된다. 그 중에 '이강'이라는 자를 보며 도산의 인품이 어떻기에 이강은 가족이 전 삶을 헌신하며 도왔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강은 평양지역 개화 운동을 선도한 임기반의 집에서 인연이 되었다. 도산을 만난 후 늘 행보를 함께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도왔다. 재러 한인을 둘러보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의 확산과 기지 개척에 전념했다. 또한 시베리아 치타에서 민족운동 기관지 『정교보』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소년 공산당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상해로 탈출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도산을 도와 임시정부 활동에 주력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도산이 상해 윤봉길 의가 배후 혐의를 받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징역을 선고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옥중에 있을 때, 감옥 근처에 거처를 잡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지어 사식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1년도 힘든데 무려 4년이나 도산을 섬겼으니 그 섬김은 과히 눈물나는 정도이다. 이강은 물론 그 아내에게 온 국민이 머리를 숙여 감사함을 전하는 바이다.
이강의 사역은 그 외에도 계속 이어져 안중근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며 도왔고, 일본 경찰에 납치되어 3년의 시간동안 옥고도 치루었으며, 광복 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며 무장 독립군 단체인 신민단의 부단장과 한중협회 간부를 거쳐 남산고등학교 교장까지하며 나라를 세우는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 외에도 많으나 그러나 그가 섬긴 것에 비해서는 일반에 너무 알려지지 않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이렇게 이 책은 도산의 업적은 물론 그의 이름 아래 가려지고 묻혀버린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업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결코 대한민국은 한 두 사람의 영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해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한 숨겨진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읽고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며,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대한의 나라를 위해 우리 또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희생이 되면 좋겠다 생각된다.
이 외에도 이 책은 도산의 가족의 모습을 비춰준다. 마지막 12장 또한 중요한 자료로서 꼭 읽으면 좋겠다. 특히 도산의 조카 딸 안성결이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자녀들이 겪은 삶의 고충과 한(恨) 뭉클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