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용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자신 혼자만 아는 마음 속으로 한 약속을 그 누구도 모를테고, 또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무방한 상황에 약속을 지킨 계찰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 보고 싶다. 계찰은 인물이 남달라서인지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왕의 모습이었다. 특히 기원전 6세기 초에 오나라 왕위 계승 문제 때에도 수몽(壽夢)이라는 왕이 어질고 남다른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을 때 계찰은 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과연 이런 왕이나 정치인들이 이 나라에 있을까? 이런 큰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나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수많은 에피소드와 같은 재미난 역사 이야기가 《사기》라는 역사책에 등장한다.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재미있고, 빨려들어 간다.
무엇보다 궁형이라는 수치스러운 벌을 받고서도 이렇게 방대한 책을 집필한 〈사마천〉의 그 집념에 경의를 표한다. 당시 궁형은 대부분 고통 속에 일찍 죽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 말로는 죽을 확률이 80% 넘는다다. 잠시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실제 말을 들어보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장이 뒤틀리고,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 넋을 놓고 무엇을 잃은 듯하며, 집을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p300
쇄골을 다쳐보았기에 그의 아픔은 10분의 1정도는 알거 같다. 다행히도 사마천은 살아남아 우리들에게 귀하고 장대한 역사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 주니 고맙기가 그지 없다. 물론 사마천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궁형을 받은 후 14년 후 56세(기원전 90년)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더 살았다면 중국의 역사는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사기》를 지음에 있어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어 드림과 함께 자신의 문장이 드러나기를 원했다. 그 이유라면 자신이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함이다. 그냥 사형을 받아 죽어버린다면 결국 그는 역사에 반역자로 기록된다. 또한 사마천은 억울함을 중국 특유의 복수관(은원관恩怨觀)이 아닌 붓과 문장으로 복수를 꿈꾸며 책을 만들어 갔다. 사마천은 치욕과 수모를 가한 자들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강렬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의 복수는 사실 꿈꿀수 없다. 그래서 사마천은 '저술함으로써 울분을 발산한다'는 『발분저술』의 문화복수를 꿈꾸며 저술을 이어 갔다. 사기에는 원한과 복수, 그리고 은혜를 갚는 보은에 관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중국의 문화는 속담에도 나오듯 '은혜와 원한은 대를 물려서라도 갚아라'는 특유의 복수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사드 문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복수관에 의한 것이다.
사기에는 이런 은원 사례가 많이 나열되는데 몇 가지만 가져오면...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채찍질을 가한 오자서의 복수(굴묘편시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탄생)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수모를 준 위나라 재상 위제에게 복수한 범수는 '밥 한 그릇을 얻어먹어도 반드시 갚았고, 지나가다 째려보기만 해도 반드시 보복했다'는 '일반필상(一飯必償), 애자필보(睚眦必報)'라는 성어를 남겼다.
-어려운 시절에 밥을 준 표모(빨래하는 아주머니)에게 천금으로 은혜를 갚은 한신(韓信)의 보은.
여기서 '밥 한 번 얻어먹고 천금으로 은혜를 갚다는 일반천금(一飯千金) 이라는 고사가 탄생했다.
몇 가지만 살펴보았는데 이것을 통해 즉 중국인의 은원관이 갖는 역사적 뿌리와 문화를 통해서 보면 중국인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조금은 풀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기세가陳杞世家〉에 등장하는 하희(夏姬)라는 여성에 대한 섹스 스캔들에 대한 얘기도 보면 한 여성이 남자들을 어떻게 주무르고, 나라를 망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이 이야기도 재미가 있고,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