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피니는 부를 과시하는 행동을 굉장히 혐오했다. 홍콩의 부유한 사교계 명사들의 삶을 정말 경멸하였다. 겉치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옷차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DFS에서 사업 기획을 담당했던 토머스 하빌이 척의 첫 인상을 이렇게 들려준다.
"맨해튼의 컨설팅 회사 크래섭, 매코믹&패짓에서 일할 때 DFS에 의뢰받은 일본의 관광 흐름을 보고하러 호놀롤루로 날아가 DFS 경영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빛바랜 알로하 셔츠에 하얀 멜빵 바지, 맨발에 구두를 신은 남자가 걸어들어오더군요. 그 사람이 척 피니였어요."
척은 검소한 삶을 더 좋아하고 일부러 그런 생활을 추구한다. 값싼 타이멕스 시계를 차고 중고 볼보를 몬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비향에서마저 가성비가 좋다는 이유로 식구들까지 일반석에 타게 한다. 그리고 파리와 몬테카를로에서 열리는 정장 차림의 만찬에 마지못해 두어 번 참석했는데, 주간지 <파리마치>에 자신과 다니엘의 사진이 실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런 행사에 아예 발길을 끊었다. 그뿐이 아니었는데 이제 막 얼굴을 익힌 프랑스 남부 사회의 부유층과도 모조리 인연을 끊는다. 특이한 인물로 보이지만 뭔가 다른 인물임을 직감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를 힘입어 자녀들이 "페라리 스포츠카"를 끌고 한껏 부를 자랑하며 도로에서 자신을 뽐낼 때 진짜 부자는 자신이 가진 부(富)를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곳에 쓸까를 고민하고 있다.
성공한 사업가인 척 피니가 검소한 차림을 고수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척이 살던 당시 이탈리아는 아이를 유괴하는 일이 많았다. 척이 사는 생장카프페라는 이탈리아 국경에서 겨우 48km이다. 당시 어린이 유괴가 무려 512건이 있었다.(1970-1982년 까지) 그 중에 18살이던 이탈리아 소녀 크리스티나는 몸값으로 200만 달러를 치르고서도 끝내 살해 당했다. 척은 바로 이것을 두려워 했다. 그래서 척의 딸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탈리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는다. 게다가 둘째 딸이 이탈리아 영화제작자이자 이탈리아 최대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새라>의 발행인 안젤로 리졸리의 딸과 친구가 된다. 한 마디로 눈에 띄는 목표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늘 걱정스러웠다. 그 집은 여봐란듯이 돈을 펑펑 쓰고 학교에 커다란 차를 몰고 왔다. 그 집 딸은 척의 가족을 무척 좋아했다. 다행히 몇 년 뒤 척의 가족은 미국으로 오게 되는데 그런데 말이다. 그 집 딸이 자기도 미국에 보내 달라고 하묘 졸랐지만 부모는 그 딸을 부유층이 다니는 스위스 학교에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척의 둘째 딸 친구인 '이사벨라'는 마약에 중독이 된다. 그리고 23살 생일을 맞은지 한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사벨라의 짧은 삶은 척에게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척은 이사벨라처럼 갈피를 못 잡고 불행에 빠진 사람들, 특히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기꺼이 집으로 맞아들인다. 십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대학에 보내고 조언자가 되었으며 척의 자녀들은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척은 뉴저지에서 살던 십대 시절에도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기로 유명했다. 어느 여름밤에는 한부모 가정의 사내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여름 내내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척은 이렇게 부는 자랑하고 보여주려고 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주고 돌봐주기 위해서, 필요한 자들에게 무언가를 내주기 위해서 부를 소유하여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제 그의 배경을 조금 들여다 보자. 그가 태어날 때(1931년 4월 23일)는 미국의 대공황 시절이다. 은행이 파산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아버지 레오는 보험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매덜린은 간호사로 일하며 성실하게 살아갔다. 그리하여 어려운 대공황을 여느 이웃보다 위기를 잘 넘겼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웃을 보살피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분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아버지도 자주 시간을 내어 남을 도우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척 또한 남을 돕고 선행을 행하며 기부를 행하는 것에 스스럼 없다. 부모의 삶이 자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보여주는 귀한 사례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척은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어릴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버는 능력이 있었다. 10살의 나이에 크리스마스카드 판매로 돈을 벌었으며, 고등학생 때는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고 용돈을 벌었다. 또한 여름이면 해변에서 파라솔을 빌려주거나 물풍선을 얼굴로 맞으며 돈을 벌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즈음 세계는 전쟁의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고 글로벌 경제는 대공황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며 재도약 기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고 싶었던 척은 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 사업은 바로 면세점 사업이다. 유럽에 주둔하던 미군이 제대할 때 유럽산 술을 세금이 면제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면세점 사업을 구상하며 정립시켜 나간다. 그런데 그게 크게 성공하면서 DFS는 외국에서 엔화를 벌어들이는 미국의 주요 업체가 됐다. 처음 시작할 때는 보따리상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였지만, 면세품 시장 전망을 확신한 그는 과감하게 하와이와 홍콩 공항 면세점에 입찰을 한다. 그의 이런 결정은 일본의 경제 호황과 맞물려 DFS는 외국에서 엔화를 가장 많이 받는 주요 업체가 되었다. 또 그는 1970년대 초 벌어들인 엔화로 부동산 혹은 단기 국채에 투자해 사업 외에도 큰 수익을 거뒀으며 이후 괌, 사이판, 알래스카, 캐나다 등에 DFS를 세우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놀랍다. 이미 그의 DNA는 사업적 DNA로 설계된 존재 같다.
하지만 척 피니의 진정한 이야기는 그 이후부터다.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에서 23위에 올랐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벌어들였지만 그에게 사업이란 자기 생각을 펼쳐 구체화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돈은 그저 결과물이었고 정작 돈을 쓰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던 척은 기부 재단 애틀랜틱 필랜스로피(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며 그의 모든 재산을 비밀스럽게 기부한다. 기부 금액은 이미 위에서 말했다. 이곳에 가진 모든 재산을 넘긴 그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호주, 아일랜드, 미국, 아프리카 등 전 세계 곳곳에 비밀리에 기부 활동을 시작하는 인생을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