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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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에 관한

인류 최고 철학자의 경험적 통찰이 담긴 책.

 

아리스토텔레스가 20세에 마케도니아 대왕이 되기 전인 알렉산드로스(왼쪽) 왕자를 가르치고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트로이전쟁 영웅 이야기인 호메로스 일리아스를 권했고, 이 책은 대왕에게 전장 애독서가 됐다. 프랑스 화가 샤를 라플란트 작, 1866.

 

행복하고 싶은 욕망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간절함일 것이다.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에 대해 매일을 고민하며 질문을 하며 살아간다. 일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TV나 영화를 보면서, 경치가 좋은 곳에 가서도 나의 이 질문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상태에서 찾게 된 행복에 대한 내 마음의 손길이다. 아리스토렐레스라는 철학자가 이 책을 썼고, 또한 제목에서 보여주는 묵직함이 이 책을 향하게 했다. 호기심과 함께 무언가 모를 어떤 특별한 용어로 보았다. 그러나 책을 펴보면 알듯이 그런 심오한 철학적 용어가 아닌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들 이름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제자가 필기한 스승의 강의(에우데모스 윤리학)를 다시 정리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견해로는 후대 편집자가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책 소개에 보면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준 강의라는 말도 나온다. 몇 가지 설 중에 어떤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윤리학이란 알다시피 인간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인간 행위와 관련한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 책은 마치 철학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잠언을 담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실천을 강조하는 철학 강론이다.

 

언제가 행복에 대해 생각하다가 행복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적어 보았다. "행복이란 내 삶을 오롯이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무언가 거창한 정의가 아닌 그저 내 마음에 느껴지는 정의이다. 이 책이 오롯이 나에게 참 행복을 가져오는 책이 될지 모르지만 1998년에 저명한 철학자들이 뽑은 서양 철학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 1위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니 기대를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인간은 모든 행위에서 "좋음"을 추구한다'는 첫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에서 독자가 느끼는 바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말 핵심을 안 존재였으며, '좋음'이라는 쉬운 단어를 매우 심오하게 느끼게 해주는 자임을 보게 되었다. 24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 저작으로 꼽고 있는데 이유라면 그는 어떤 명제를 위해 추론 과정과 통찰력이 가득한 전개 과정을 밟아 가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것이다 하는 단순한 결론적인 정의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오한 윤리를 이해 할 수 없다. 따라서 조금 복잡하며 말 장난처럼 느껴지는 글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전개 과정은 심오한 논리가 숨겨져 있기에 차근차근 그의 글을 읽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은 모든 기술과 학문은 물론이고, 모든 행위와 이성적 선택에서 어떤 "좋음"을 추구하는 존재다. 좋음은 대중이나 양식 있는 사람 모두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대중과 철학자들은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병들었을 때는 건강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가난할 때는 부가 행복이라고 하는 등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좋음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좋음이면서 이 모든 좋음을 좋음이 되게 하는 그런 좋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좋음에 대해 깊이 살피지만 이 또한 좋음에 대한 한 가지일 뿐이다. 즉 좋음에 대한 원형이 무엇인지 철학자들은 찾아가지만 사람들은 그 좋음의 원형에 대해 사실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직조공이나 목수가 좋음의 원형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기술을 향상하는 데 그렇게 도음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자'며 그런 사변적인 정의에 대해 문을 닫아 버린다. 무익한 논의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책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 문장이 책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여러 좋은 문장과 논리적 전개가 있지만 이 책에 눈에 띄는 부분을 언급하며 소개해 보고자 한다.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p.369

 

행복한 사람에게 친구가 필요할까? 여기에 대해 의견은 갈린다. 어떤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하고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면 좋은 것을 이미 다 가졌고 부족한 것이 없어 더 이상 필요한게 없으므로 그들에게는 친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친구란 타인이면서도 자기 분신이어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므로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신이 도와준다면, 친구가 왜 필요하겠는가"라는 말이 나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외적으로 좋은 것 중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친구가 그에게 없음은 이상해 보인다. 친구는 도움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좋은 사람과 미덕도 그렇게 하며, 모르는 사람보다 친구를 돕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라면, 훌륭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도움을 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친구가 더 필요한가, 곤경에 처했을 때 친구가 더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 해답은 "곤경에 처했을 때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친구가 필요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자기가 도움을 줄 친구가 필요하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또한 친구가 없고 혼자인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기도 이상하다. 모든 좋은 것을 다 줄테니 친구 없이 혼자 살아가라고 한다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은 친구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아가기 어렵다. 아무리 그 자체로 즐겁더라도 잠시라면 모를까 혼자 지속해 활동하며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자연인이다 방송을 보더라도 자연인 또한 최소한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으며, 또한 방송인인 이승윤, 윤택이 함께하는 시간, 요리를 해주는 시간을 굉장히 행복한 시간으로 여기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타인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옳은 정의임을 알게 된다.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면 인생은 더 수월해진다. 함께하면 그 자체로 즐거운 활동을 지속하게 되는데, 이것이 행복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다. [...] 또한 테오그니스가 말했듯,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미덕을 훈련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더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훌륭한 사람은 본성적으로 훌륭한 친구를 선택하려 한다. 본성적으로 좋은 것은 훌륭한 사람에게 좋고, 그 자체로 즐겁기 때문이다p.367

 

좋음이 왜 좋음인지, 그리고 그 좋음 안에서 진정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훌륭한 친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요한 논리로 우리들을 설득한다. 그렇다면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가 아니면 적당한 것이 좋은가? 아리스터텔레스는 말하길 너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많으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기에 소수의 친구들만이라도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라고 한다.

 

그렇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좋음'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좋음에 있어 좋은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은 삶의 행복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데 그건 "고결한 것은 고결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법이다"고 정의를 해준다.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통찰을 통해 우리는 다방면에서 행복의 좋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행복이 오롯이 개인의 것이 아닌 공동체적인 것으로 연결지어가는 것을 통해 잘못된 행복을 짚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행복에 대해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정리를 내린 간결함이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뭘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행복에 대해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그 무엇이고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행복을 연구하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 결론지었다고 하는데 이렇듯 행복은 불확실한 무엇을 추구함이 아닐까 싶다. 이마누엘 칸트도 말하듯 행복의 개념은 아주 불명확한 것이어서 모두 행복을 얻고자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누구도 명확하고 일관되게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행복에 대한 정의는 이렇게 정의 내리고 싶다. 나의 친애하는 여행자들에 나오는 문장인데 행복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주관적인 만족감이잖아요. 내가 원하는 나만의 명확한 기준이 세워져 있다면 그리고 그 기준을 따르면서 살아간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최고의 일은 바로 직관적 지성을 통한 "관조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할 때 지성의 관조적 활동은 인간의 일이면서도 신과 가장 닮았고,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그 관조적 활동은 "철학 하는 삶"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리고 그런 미덕은 위에도 언급했듯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조금 복잡한 내용들이지만 결국 행복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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