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고전의세계 리커버
장 자크 루소 지음, 황성원.고봉만 옮김 / 책세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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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두 가지 정도 알고 있었다. 세계 3대 고백록 중의 하나인 고백록(Les Confessions, 1769)을 썼다는 것과 자녀 교육에 대한 자신의 철학에 대한 상반성에 관한 것이다. 고백론은 어거스틴이나 톨스토이 보다 더 내밀한 인간 본연의 감정을 서술했다는 것이다. 거기엔 자신의 모순에 대해 폭로하기를 서슴치 않았는데 성(性)에 관한 그의 글에 관해 어떤이는 포르노 책을 읽는 기분이 들어 책을 던졌다고 한다. 물론 후에 다시 읽으니 이 책은 '참회록'으로 읽혀졌다고 한다. 또한 《에밀》은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 저작이면서, 동시에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방법을 다룬 교육론이다. 특히 자녀를 키움에 있어 수녀원이나 가정 교사에게 아이를 맡기지 말고 부모가 그 아이을 직접 기르고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상류 계급의 부인들은 유모에게 수유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의 아이들 5명을 모두 보육원에 맡겨버렸다. 그래서 그를 질타하는 이들은 이상적인 자녀 교육 방식을 300년 전에 제안했지만 그는 교육론을 쓸 자격조차 없다고 비판했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대도시에는 가정 교육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곳에서는 사교계가 너무 일반화되고 마구 얽혀 있어 몸으 피해 지낼 만한 곳이 없으며,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니 가족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부모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다. 자식은 부모를 마치 낯선 사람처럼 바라본다. [...] 부모들은 일과 사회적 지위, 휴식에만 힘을 쏟을 뿐 아이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소홀했다. 귀족들은 자신의 인생을 향유하기 위해 부모의 의무마저 게을리한 채 유모와 가정교사 그리고 콜레주의 선생들로 자신들의 부재를 메웠다." -p11 머리말에서

이런 두 가지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이지만 에밀과 그의 고백론은 시간을 두어 읽고자 했지만 다른 책이 끼어들어 미루다가 이번 기회에 에밀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일단 이 책은 《에밀》의 원전 전체를 담고 있지 않다. 원전은 총 5권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 독자가 전체를 읽기 쉽지 않는데 책세상 ‘고전의 세계’ 시리즈를 통해 핵심 사상을 담아 출간한 것이다. 《에밀》의 핵심 사상을 담은 머리말과 1장을 번역해 엮었으며, 2~5장의 내용은 ‘해제’에 요약해두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몰랐다. 당연히 에밀 완역본이라 생각했는데 에밀이라는 책이 그렇게도 두껍구나 하는 소중한? 정보를 얻고 간다.

들어가는 말에 보면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루소는 자신의 모든 저서에 들어 있는 근본 원리가 《에밀》에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원리란 바로 “인간은 본원적으로 선하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신이 처음 만든 아담처럼 마음이 순수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당시 사회에 통용되던 기독교적 원죄설에 정면으로 대립되어 수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루소의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것다. 그건 구약성경 전도서 7:29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참으로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한 반면,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서 속수무책 나빠진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교육론에 대한 문제의 핵심이다. 즉 인간은 선하지만 인간들은 악하다. 무엇 때문인가 할 때 그건 바로 '사회' 때문이다. 그 옛날 선한 본성을 유지했던 원시의 인류에게는 사실 교육자가 필요 없었다. 자연 자체가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회는 부패하고 도덕은 붕괴가 되었다. 인간은 본성을 망각한 채 사이비 교육자에 의해 길러지고 타락의 나래로 빠진 것이다. 루소는 이런 인식하에 인간이 본원적으로 지닌 자연적 선함을 어떻게 하면 참된 교육으로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을 지를 심도 있게 논의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에밀》이란 책을 낳게 만든 것이다.

해제 부분을 보면 구체적인 핵심을 뽑아 놓은 문장이 있다. 루소는 《에밀》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학문은 오직 인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교육이 변호사, 의사 혹은 기술자 등 미래의 직업인 양성에만 목적을 둔 채 직업에 대한 지식과 기술의 전달에만 가치를 둘 뿐 인간다운 인간의 형성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며, 인간을 인간답게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말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다. 자연인이란 인간 본연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길을 따르도록 하라"고 했다. 즉 자연을 거슬러서 새로운 무엇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위적인 것들을 배격하는 것이며 인간 발달의 자연법칙에 따라서 교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루소는 자신의 교욱 방법을 '자연적 교육'이라고 불렀다. 루소의 말대로 반복되는 말이지만 '아이는 선하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아이의 그 천성적인 선함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교육은 당연히 이러한 본성 또는 심성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적극적인 교육에서 '소극적인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아이의 교사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젊은 선생이여, 나는 그대에게 한 가지 어려운 기술을 간곡히 권한다. 그것은 훈계하지 않고 지도하는 일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하는 일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그를 자유롭게 혼자 내버려두어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 그저 바라보라. 그리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관찰하라.”

루소의 <에밀>은 이렇게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성년기, 그리고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할 때까지의 교육에 관한 모든 질문과 해답을 담아 놓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아동의 성장 발달 단계를 다섯 단계로 구분해 단계별로 적합한 교육 과정을 제시한다.

발달 돤계는 크게 영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그리고 성년기로 나뉜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가히 아이를 위한 인성교육이나 독립적인 홀로서기를 위한 자연주의 교육의 진원지라 일컫는다 하더라도 무리가 없는 정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후대의 많은 인물이 《에밀》의 사상에 흠뻑 빠져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칸트에 대한 얘기다. 평생 시계처럼 날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칸트가 딱 한 번 산책을 거른 적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에밀》을 읽던 날이었다고 한다. 또한 괴테는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호메로스를, 그리고 머리에는 언제나 《에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진중문고에 《에밀》을 꼭 챙겨 다녔다고 한다. 스위스의 교육자이며 사회비평가인 '페스탈로치'는 《에밀》을 읽고 감동받아 "왕좌에 있으나 초가에 있으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어린이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19세기 신인문주의자 교육자 중 한 사람인 '프뢰벨'은 페스탈로치를 만나 루소의 교육 철학에 공감하고 자신의 교육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가 만든 '킨더가르텐kindergarten'(어린이들의 뜰)은 오늘날의 '유치원'에 실천적 골격을 제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말했듯 루소가 "그 무엇보다 아이들 편에 있었고, 그 후로 누구도 그만큼 하지 못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눈높이 수업에 대해 미리 눈뜬 교육의 어머니였다.

이 책은 예비 교사는 물론, 올바른 자녀 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라면 꼭 읽어야만 하는 필독서로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퇴계 이황의 글을 남겨 본다. 그 또한 한국에 위대한 교육자로서 공부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공부란 그저 천자문을 줄줄 외우고, 적절한 때에 논어, 맹자를 인용해 잘났음을 과시하거나, 과거에 급제해 평생을 고생 없이 사는,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삶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평생을 살아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선생이 태극도설을 통해 배순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 (p. 44~45)

"아침저녁으로 책읽기에 몰두하고, 경전을 제대로 해석해낸다 해서 과연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공부를 하고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건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네.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알고 싶으면 남도 깨우쳐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의 마음, 사랑의 마음, 공부한 자의 마음일세. 그 인이 어디 멀리 있던가? 주변에서 능숙히 비유를 취할 수 있다면 인의 길에 접어든 것이지. 이 군, 자네는 지금 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자네 주변에서 능히 취할 수 있는가? 정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p.142)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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