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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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출판되었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유다가 주는 느낌을 단번에 알 것이다. 바로 '배신'의 아이콘이다. 그는 예수라는 메시야를 팔아넘긴 배신자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즉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말과도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모든 유대 민족은 배신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민족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1939~2018)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이미 그에 대한 책이 번역되어지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내털리 포트먼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의 원작인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아쉽게도 아직 보지 못했다. 거기에 나오는 대사가 괜찮아 일단 가져와 본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조금만 비열해도 서로에게 지옥이 되고

조금만 베풀어도

서로를 천국으로 인도하리라.

이 문구를 하나만을 보더라도 '아모스 오즈'라는 작가가 가진 묵직함과 그가 가진 세계관을 이해해 보게 된다. 이 책은 먼저 책 끝부분에 있는 옮긴이(번역자)의 말을 읽고 살펴보면 좋다. 소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엇을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저자 오즈는 동족의 비난을 무릅써 가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 공존을 주장한다는 것은 N극과 N극이 하나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다.(2000년 이후 양국가는 갈들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됨/그리하여 그는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중단하고 작품에만 몰두함) 즉 절대적으로 하나 될 수 없는 상태로 보고 있는데 오즈는 두 국가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화 공존을 주장하니 동포들에게 그는 '유다'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의 면모는 소설 <유다>에서 성서 속 인물 유다와 함께 또 다른 ‘배신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지식인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의 모습에 짙게 투영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오즈는 유다와 아브라바넬이라는 두 배신자를 통해 기독교와 유대 민족의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를 자기 나름으로 정리하여 소설 <유다>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언처럼 그는 소설을 통해 지금도 말하고 있다.

특히 아모스 오즈는 세상을 뜨기 두 달 전 암으로 투병하면서 가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주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렇게 대답했다. "절대적으로, 작품을 쓸 때는 물론 작품을 쓴 후에도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 단지 이 대목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아이디어 소설이다. 그것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과 같다. [...] 내 책은 추운 겨울, 세 명이 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 논쟁하는 이야기다. [...] 이념이 꼭 대화를 척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건강 상태에 관한 소문에 대해서 그는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긴다. "나는 좋지 않다. 그러나 나는 싸우는 중이다."

여기서 이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독자인 나도 이 부분에서 이 책이 가진 매력과 호기심이 발동 되었으니 말이다. 그건 이러하다.

슈무엘은 자기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가롯 유다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독교인, 한 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기독교인, 끝까지 예수가 온 예루살렘 앞에서 그리고 온 세계 앞에서 틀림없이 일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리라 믿었던 기독교인,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가 떠난 이후에 더 살려고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죽었을 때 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유일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이 [...] 배신의 화신이며 유대교의 화신이고 유대교와 배반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보여 주는 화신이었다. p284-285

[…] 만약 그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고 기독교도 없었으며 교회도 없었을 것이고, 그가 없이는 그 나사렛 사람(=예수)도 갈릴리 변방에서 와서 기적을 일으키고 설교를 하던 시골 사람들 수십 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p287

아모스 오즈는 지금 소설속 인물을 사용하여 유다를 다르게 보고자 한다. 즉 과연 유다는 배신자인가? 유다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을 뿐인에, 유다야말로 가장 믿음직한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배신이란 충성과 헌신, 확신과 신념의 한 형태가 아닐까? 라고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작가는 '답 없이 남겨진 어떤 종교적 물음'을 유다의 독백에 담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내 목숨처럼 사랑했고 나는 그를 완벽하게 믿었지. [...] 나는 그를 하느님처럼 사랑했어. [..] 하느님은 잔인하고 분노하며 피흘리기를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의 아들은 내가 보기에 사랑이 넘치고 자비롭고 용서하며 동정심이 많고... 가슴이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 그는 나에게 하느님이었어. 나는 죽음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할거라고 믿었지. 나는 바로 오늘 예루살렘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어. 그 기적이 일어나면 이후로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질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기적 말이야. 이후로는 더는 아무런 기적도 필요 없는, 이후로 하늘나라가 도래하고 사랑만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그런 기적 말이야.

p404-405

이 책에 나오는 유다에 관한 전복적인 해석은 사실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치부하는 ‘유다 복음서’의 주장과 연결되는데 이 소설의 원제도 ‘유다 복음서’라고 한다. 저자가 소설 속 '슈무엘'이 배신자 유다의 복권을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그에게서 아브라바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브라바넬은 고대 이스라엘 왕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유대인기구의 이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영국인들을 내쫓고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꾼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자인 아모스 오즈가 이 같은 배신자라는 주제에 천착한 것은 결국 자신의 삶과도 관련 있는데 그는 1939년 우파 시온주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그는 우리나라에는 매국노와 같은 '가롯 유다'라는 배신자 취급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700킬로미터 길이의 분리 장벽이 세워졌을 때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나는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주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오늘날 유다를 바라보는 입장을 그는 새롭게 다지기를 원한다. 과연 유다는 배신자일까 아니면 앞서 시대를 앞서 나간자일까? 어쩌면 유다에 대한 해석에 대해 억지적 추측과 괴변일 수 있지만 그가 말한 의미는 한 번 깊게 되짚어 볼 만하다. 그 이유는 진정한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자가 혹시 유다(저자가 주장하는)일지 모르고,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주장하며 평화를 원하는 저자 자신의 주장이 하느님의 뜻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성경 또한 신약성경 로마서를 보게 되면 15장 9-12절에서 이방인들이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부지런히 언급하기를 평화와 사랑과 용서를 언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신념(공존)은 배신이 아닌 하느님의 꿈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한 문장

아모스 오즈는 묻고 있다. 과연 누가 배신자인가? 만약 아브넬이 배신자라면,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인 역시 배신자란 말인가? 예레미야도? 엘리샤 벤 아부야도? 링컨도? 드골도? [...] 배신이란 충성과 헌신, 확신과 신념의 한 형태가 아닐까? 세상은 충신과 배신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배신자들로 나뉘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통틀어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용감한 사람들에게 배신자나 광인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예는 많다. 배신자란 ‘세상의 회복’, 즉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이를 지상에 구현하려 했던 모든 천사의 다른 이름이었다.

p373-374, 517-518


“[…] 이런 모든 종교는, 지난 세기에 태어난 수많은 종교 중에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고 있는데, 모두 우리를 구원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피를 쏟게 만드는 것이라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세상의 회복을 믿지 않네. 글쎄. 그러니까 나는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회복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일세.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이 그 자체로 매우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분명히 아니지, 이 세상은 비뚤어졌고 암울하며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회복시키겠다고 나타난 자들이 순식간에 피의 강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일세. 오시게, 이제 함께 차나 한잔 마시고, 자네가 오늘 내게 가져왔던 말도 안 되는 글들은 한쪽으로 밀어 놓게. 언젠가 이 세상에서 모든 종교와 모든 혁명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내가 장담하건대―마지막 하나까지, 예외 없이―이 세상에 전쟁들이 훨씬 적게 일어날 걸세. 사람이란, 이마누엘 칸트가 쓴 적이 있는데, 결국 본성상 비뚤어지고 닳아빠진 그루터기일 뿐이라고 했지. 우리가 목까지 피에 잠겨 건널 생각이 아니라면 그를 대패질할 생각도 말아야겠지.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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