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 - 빨간 마후라 신영균의
신영균 저자, 박정호.김경희 정리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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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개봉한 '빨간 마후라'라는 영화 제목은 분명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그러나 그 주인공인 '신영균'이라는 인물은 사실 잘 알지 못했다.

당시 인물 중에 유명한 배우를 안다고 할 때 그 이름은 바로 '신성일'이라는 배우이다그가 나온 영화는 종종 TV를 통해서 보게 되었고, TV 프로에서도 가끔 나왔기에 신성일이라는 이름은 엄앵란과 더불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영균이라는 배우는 미안하게도 잘 알지 못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 미안함이란 다름아닌 신영균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들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은막을 주름잡았던 원로배우의 삶의 얘기는 내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고,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도 멋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신영균이라는 배우를 모르는 분이 있을 것이다. 잠시 소개하면 그는 1978년 배우로서 잠정 은퇴하기 전까지 300여 편의 영화를 찍으며 한국 영화계를 이끈 인물이다. 배우 시절부터 금호극장, 명보극장을 인수하고 명보제과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물론, 신스볼링, 한주흥산 등을 설립해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연예계 최고 자산가로 이름난 신 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히고 있다. 2010년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했을 뿐 아니라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하였다.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 주면 됩니다.” p390

 

참으로 인물 중의 인물이다. 언젠가 홍콩 배우인 주윤발과 성룡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런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있으니 바로 신영균씨다.


그는 1928116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팔대리의 작은 마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신태현과 어머니 신순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0살 무렵 즉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는 경성부(서울)로 이사해 동대문구 흥인초등학교를 다녔으며 한성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교 시절인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극단 청춘극장에서 인연을 맺었던 배우 전옥 씨(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이자 강효실 씨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연극부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연극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었고, 그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에 연극 대사를 외우던 실력으로 공부에 몰입하여 서울대 치대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처럼 대학에 들어가기가 힘든 시절이 아니라 하지만 대단한 열정으로 가정을 책임지려고 다한 노력이 이런 결실을 맺은 것이라 본다.


책을 펼치면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파우스트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그는 말한다. "진부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노력하는 인간'이란 문장은 내 삶을 꿰는 키워드다."

 

남들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뛰어난 것도 적지만 노력하나에서 만큼은 그 누구에 뒤지지 않았다고 자부하며 거북걸음이자 황소걸음으로 목표를 향해 내 딛고 내 딛어 결국 영화 배우라는 꿈을 이루고, 사업가와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멋지게 마무리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노욕, 혹은 과욕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신영균이라는 배우가 이 땅을 거쳐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흔적들이 있기에 한국 영화사 100년의 기록 또한 눈으로 확인하는 혜택을 우리는 누리게 되었고 그의 삶을 다각도로 비춰주는 흔적을 보여줬기에 우리의 삶도 그를 통해 비춰보게 된다.

 

지난 세월 자신이 받은 탤런트를 남김없이 쏟아왔으나 괜히 객담만 늘어놓은 건 아닐까 싶다는 그이지만, 그의 인생이야말로 고난의 20세기를 살아온 많은 한국인의 얼굴이 아닐까 싶다. 이원종 전 서울시장의 말처럼, “선진국의 특징은 기록문화다. 영광과 치욕의 순간을 모두 남겨야한다. 한국영화 전성기를 지냈던 그 시절 배우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이 시점, “후회 없이 살았다는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 신영균의 비망록이 더 없이 소중한 이유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어머니와 신앙

 

배우 신영균씨를 있게 해 준 두 개의 단어가 있다면 그건 "어머니와 신앙"이라는 단어이다.

 

어머니와 신앙은 구순의 배우를 지금까지 든든하게 받쳐온 두 버팀목임을 밝힌다. 즉 어머니와 신앙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굳이 기독교가 굳이 아니더라도 종교를 가지고 살기를 권한다. 그건 바로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삶을 다 잡아 주는 구심점'이 되기 때문이다.

 

"일평생 교회를 다녔다. 어린 시절엔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 갔고, 요즘에는 가족들과 함께 간다. 온 가족이 참여하는 주일 예배는 지난 한 주를 마감하는 종착역인 동시에 새로운 한 주를 여는 출발역이다." p7

 

그는 신앙을 어머니를 통해서 체득하였다. 그의 신앙은 여타 신앙인들처럼 1년에 몇 번이나 가는 신앙도 아니고, 프로필 종교란에 어쩔 수 없이 적어야 하는 구색맞추기도 아니다. 그의 신앙은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실함과 마음이 담겼다. 그는 매주 일요일 불가피한 일이 있지 않고선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평소 아끼는 물품 중에 '어머니의 기도' 동판을 중요시하며 살펴본다. 이 동판은 90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만든 동판인데 어머니를 향한 지극 정성의 마음과 신앙심이 보인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거라고 당당하게 밝히며 나아간다.

 

어머니는 30대에 홀로 되셨다. 신영균씨 나이 6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후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그러니 얼마나 그 삶이 힘들었겠는가? 삼남매를 키우며 갖은 고생을 한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도 한다.

 

"영균아, 너는 절대 탈선하지 마라.

교회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p36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는 기도하셨으며, 자녀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듣는 걸 가장 경계하며 자녀를 길러 나갔다. 그래서인지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한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교육열에도 남달랐는데 신영균씨 10살 무렵 용단을 내리며 서울로 거쳐를 옮기었다. 이 또한 그의 인생에 큰 획을 긋게 되는 계기가 되어 진다.

 

특히 이 부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수 많는 배우들이 유명인이 되고 소위 성공을 하면서 탈선하게 되는 일이 많다. 요즘이나 과거나 마찬가지로 연예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생활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대배우인 그는 평생 술, 담배와 도박을 멀리했을 뿐 아니라 여자 문제도 단 한번이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모범 배우로 살았다. 사생활에 절제가 부족했던 다수의 연예인과 달리, 철저한 자기관리와 충실한 가정생활로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드높여 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절대 한눈팔지 않겠다고 말이다. 국내 쵤영은 물론 해외 로케이션에도 아내와 동행한 경우가 많다. 아내는 지금도 60년 전의 약속을 지켜준 것을 고마워한다. 신뢰는 부부 사이에서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아내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배우 신영균 또한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p32

 

배우로서의 모습과 인생 비망록

 

2019년은 한국영화사 100주년이었다. 그해 5,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프랑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0202월에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영화로서도 그렇고 아카데미 시상 역사상 유례없는 4관왕을 석권했다.

 

송강호가 이야기하듯, “오늘날 한국영화가 이뤄낸 쾌거는 결코 특정 영화와 영화인만의 것이 아니라, 열악한 제작 환경 속에서도 힘겹게 영화를 만들어온 선배들과 이 시대 모든 영화인의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선배 가운데 신영균씨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2019년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에서 영화평론가 전찬일은 한국영화 100년을 빛낸 남성 스타 10을 꼽으며 원로 배우 신영균씨를 한국영화의 남성 아이콘으로 그 이름을 넣었다.

 

그렇다. 그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불리는 1960년대, 제목만 들어도 ~’ 할 만한 영화 중에 <빨간 마후라>(1964)<미워도 다시 한번>(1968)에 출연한 주인공이다. 서울 인구가 갓 400만이 넘었을 당시 각각 25, 37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을 정도로 요즘으로 치면 최소 1,000만 영화인 셈이다.

 

그 시절 많게는 1년에 30여 편의 영화를 찍은 톱스타로서 30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긴 그는 배우로서 은퇴한 뒤에도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영화를 위해 힘써나가고 있다.


결혼 후 치과의사로 생활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연기에 대한 갈망에 연극 <여인천하> 무대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1960년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하게 되었으며 서른둘 늦깎이 신인이었지만 데뷔 2년 만에 영화 <연산군>을 통해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게 되면서 소위 <출세작>을 찍게 되었고 벼락 스타가 되게 된다. 그리고 <빨간 마후라>로 제 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 편의 한국 영화계의 역사이며, 기억해야 할 영화와 영화인들의 이야기는 물론, 원로배우 신영균이 걸어온 삶의 기록이 수많은 사진과 함께 담겨서 우리에게 한편의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책에는 기사에 싣지 못한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정사와 야사가 적혀 있어 책을 읽는 재미가 소소하게 있다.

 

한국 영화계는 놀랍도록 성장하게 되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다라고 말할 정도로 영화의 수준과 작품성은 이제 세계를 향해 당당히 내딛고 있다. 그 가운데는 수많는 영화계 감독들과 선배 배우들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이 책은 여실히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대배우인 '신영균'의 삶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의 삶과 영화 사랑, 그리고 신앙적 모습은 많은 연예인들만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의 곧은 인생을 보게 되어서 좋았다. 그렇다. 탈선에 속한 연예인들이여 당신의 삶을 돌이키라. 깨끗하게 살라. 그리고 신영균씨처럼 가진 것을 나눠주며 베푸는 존재로 살아가라.

 

물론 이 말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니 고깝게 듣지 말기 바란다.

 

그의 이 말을 다시금 곱씹고 싶다.

 

후회 없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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