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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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먼저 저자의 프로필을 넘어 화려한 저술 활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저자가 집필한 책만 하더라도 공저 포함해서 알라딘 공식 자료에 의하면 214종이나 된다. 번역한 책만해도 18권이 넘는다. 한 마디로 괴물이다. 단 한권의 책을 만들어 내는 것만해도 쉽지 않건만 어떻게 저자는 이러한 방대한 지식의 향연을 펼치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 책은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 이야기인 『인문학의 거짓말』에 이어지는 중세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문학의 거짓말』에서 고대 인문에 대해 쓰면서 부처나 예수도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다. 반면 서양의 주류 사상인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는데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관심이 가졌다. 그리고 그들과 대립한 사상가로 오쇼 라즈니쉬와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알게 된 디오게네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즉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대립한 사상가로 디오게네스를 내세운다. 괴짜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는 예수로 이어졌으나, 예수의 아나키즘은 바울과 콘스탄티누스 등에 의해 배신당하여 서양 중세 1,000년의 세월 동안 왜곡되었다는 그의 주장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이 자신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를 아나키스트 예수의 믿음으로 되돌려야 그 제국주의를 끝낼 수 있다는 그의 논지가 이 책을 통해 펼쳐지게 된다. 책 머리(프롤로그)에 나오는 그의 글을 통해 나오는 부분을 정리했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에 대해 홍보를 다했다고 본다.

이어서 저자는 흔히 생각하는 중세에 대한 얘기를 서양 중심이 아닌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중심으로 이 책을 펼쳐나간다. 서양 중세는 이 책에서 4분의 1정도 언급되었다. 특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는 달리 비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새롭게 주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가 가장 찬란한 개방(개명)적 시기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비서양 근대가 암흑기가 찾아옴에 있어 서양 근대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암흑시대로 전락했다고 하는데 이들의 영향은 즉 서양 중심의 근대는 2019년 '코로나 19'라는 결과를 결국 맞이하게 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조금 더 길게 보면 16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고 하는데 이런 그의 주장이 더욱더 이 책을 읽게 만드는 요소인거 같다. 그래서 그는 흔히 신대륙 발견을 말할 때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것을 '지리상의 침략'으로 본다. 즉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양 중심의 중세 인식을 비틀어 보고자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저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보자. 저자는 1983년에 일본에 공부하러 간 이유 중에 하나가 노동법의 선배 교수로서 일본 교수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일본의 역사학자로서 역사 교과서 논란을 일으킨 '이에나가 사부로'가 쓴 "일본 문화사"를 보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상식인 일본 중세 문화는 한반도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또한 미국에 가서도 일본 문화사에 대한 책을 읽어 보니 당시 유명했던 '폴 발리'의 '일본 문화사' 또한 한국에 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 책만 아니라 서양 책 모두가 그러하고, 여기에는 한국만 아니라 비서양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세계사 속에 중세란 오직 서양 중심의 중세였다. 비서양의 중세가 있지만 그러나 그건 서양이 바라본 중세였다는 것이다. 아니 세계사가 서양사였다. 조금 거기에 무엇을 보탠다면 중국사나 일본사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서양 중세를 암흑기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최근의 경향에 반론을 제기하고 반대로 인도, 이슬람, 중국, 한국의 중세를 그 각각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개방적 시기로 새롭게 보고자 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근대가 시작하면서, 즉 서양이 세계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비서양은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포스트모던이즘이니, 세계화니 라는 말이 나와도 서양 근대의 제국주의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이 책은 끝으로 말해주고 있다.

암튼 이분은 대단한 학자이며 범접할 수 없는 인문학자임은 틀림이 없다.

이 책의 한 문장

버트런드 러셀은 방대한『서양의 지혜』에서 이 책에 대해 단 서너 줄로 말한다.

"내용의 대부분은 오로지 골동품 연구가나 흥미를 느낄 정도의 것이다." 이 책이라 할 때 중세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책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말한다. 저자는 러셀의 말을 가져와 이 책만 아니라 중세 문헌의 대부분이 해당된다고 말한다.

반면 종래 무시되었던 중세인이라도 지금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재조명해야 될 사람이 있으니 바로 '펠레기우스'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설을 부정하고, 누구나 착하게 살면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반박해 바울의 편지에서 숙명론, 즉 예정조화설(예정론)을 이끌어냈고, 이를 종교개혁 때 장 칼뱅이 채택했다. 나는 러셀처럼 가톨릭에서 그것을 폐기한 것을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고 보고, 마찬가지로 '츠베탕 토도로프'처럼 그 둘의 논쟁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p25

"적어도 1,000년까지 기독교의 이단 배척으로 중세에는 인문이 없다시피 했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도, 건축이나 회화를 비롯한 예술도, 대학을 비롯한 각종 학교도, 도서관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우리 사회에 떠도는 지진을 신이 정권에 내린 저주라고 보는 요설은 과학과 의학을 배척한 중세 기독교에서 나왔다. 서양에서도 중세에는 분서갱유가 끊이지 않아 책이 사라졌다. 그래서 히틀러 시대에 유대계를 포함한 반체제 지식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듯이 기독교 치하의 지식인들이 아랍권으로 대거 이주해 인문을 이전시켰다.

이슬람국가가 저지른 성상 파괴 운동도 서양 중세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중세 인문은 서양이 아니라 아랍과 인도와 중국 등에서 꽃을 피웠다. p22

이 책은 세계를 보는 눈을 달리해 주는 책이다. 그동안 우리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에 비춰 동양과 비서양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자의 통찰력을 통해 그 모든 눈꺼풀이 하나씩 풀어헤쳐진다.

처음 이 책을 대할 때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는데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아주 논리정연하고 글을 연결하는 기법이 뛰어나며 저자 특유의 관점이 보인다. 저자가 발견한 관점인지 아니면 저자 또한 다른 글을 통해서 얻은 통찰력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저자의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고 있는거 같아 기존의 인문학적 세계관을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이 책만 아니라 먼저 나온 책을 통해서 저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새롭게 사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바가 때론 편향적인 입장에서 바라봄으로 서양적 사고나 기독교 세계관을 이렇게 바라보아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 또는 아쉬움도 있다. 어차피 양쪽에서는 서로의 입장에서만 보니까 진정한 객관적 사실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서양 중심으로 똘똘뭉쳐 있거나 기독교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성을 향해 흔히 니체를 일컬어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하듯 '망치를 든 인문학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중와부지대해(井中蛙不知大海)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세상을 내 아집으로만 바라보는 고집센 영감이 될 것이다.

정약용이 이런 말을 하였다. "열집 남짓사는 시골에서 퉁소좀 분다고 이름나도 서울기생방 일급연주자 앞에선 고개도 못드는 수준이며 잘 모르는 것들이 조잡한 운구로 스스로를 도연명이나 사령운에 빗대고 어설픈 글로 왕희지나 왕헌지에 빗댄다고 했다."

그렇다. 겸허히 책을 보게 되는 시간이 되어 좋았다. 세계를 좀 더 인문학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저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낸다.

단 한권의 책밖에는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을 경계하라

-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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