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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이 (특별판) ㅣ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한정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8월
평점 :
흘러간 시간 속의 사람들과
잊혀져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
어른이 된 딸과 치매로 아이가 된 엄마의 회상!
“우리 집 살림 밑천 기특한 맏딸!”
아버지의 그 말은 늘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일단 정감이 가는 제목과 그림이라서 호기심이 일어나 선택하게 되었다.
"맏딸은 우리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나의 세대는 듣지 못했지만 부모 세대에서는 아마다 많이 말해왔던 말이지 싶다. TV 드라마를 보면 바로 그 시절의 추억을 잘 소환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의 세대도 말해 왔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것을 듣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서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독자인 내가 태어나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 초반이다. 이 책 또한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의 이야기이다. 깡깡이 일을 하며 다섯 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던 엄마와 맏딸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에게 희생한 정은의 모습이 이 책 안에 그려져 있다.
독자인 나는 이 책을 통해 과거를 소환해 오고 싶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돈이 들지 않는 낭만의 여행으로서 왠지모르게 스타워즈에 나오는 우주선을 타고 먼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물론 무한대 우주로 빨려가는 공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나의 세계를 보고, 내 주변 세계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정기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재탄생 시켰다. 저자는 동해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산 영도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가난을 떨쳐내기 위한 경제개발운동이 한창이던 때였고, 70년대 영도 대평동은 수리조선소가 번성하는 때였는데 이때 저자는 그 언저리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살아왔다. 잠시 이 소설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도 대평동은 조선소 도크에 올라온 배에서 떨어낸 녹과 쇳가루가 마을을 뒤덮었고 여기저기서 용접 불티가 튀었지만 몇 걸음만 나가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소설에서는 그 모습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소설을 빌려 썼지만 분명 저자가 그때 경험한 여름 추억 속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림 언어가 매우 멋지게 그려지는 장면이다.
조선소 가는 길에는 한여름 숲에 쏟아지는 매미 소리처럼 깡깡이 소리가 쏟아졌다. 공기처럼 익숙해 의식하지 못했던 그 소리도 엄마가 깡깡이 일을 하러 가니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시내와 이어지는 영도다리를 건너오면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바닷가에는 선박을 수리하는 작은 조선소가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깡깡이 아지매'들은 낡는 배를 수리하고나 새로 페인트칠할 때 배의 녹을 떨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짠 바닷바람에 노출된 배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었고 바닷물에 잠긴 아랫부붕에는 따개비나 담치 같은 해양생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것들은 배의 속도를 느리게 할 뿐 아니라 쇠를 부식시키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벗겨내고 새로 페인트를 칠해야 했다. 깡깡이 아지매들은 끝이 납작한 끌처럼 생긴 망치로 쇠를 두드려 녹을 떨어낸 다음 쇠 솔로 다시 한 번 더문질러 남은 녹까지 깨끗하게 털어내는 일을 했다. (...) 깡깡이 아지매들은 자신들의 삶에 녹처럼 붙어 있는 가난을 떨어내듯 안간힘을 다해 망치질을 했다. "깡깡깡깡........." p46-47
그렇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매우 뛰어난 감수성과 함께 과거를 영화의 필림처럼 그림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부산 사투리의 자연스런 입말이 살아 있음은 물론이고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은 책 소개에서도 나오듯이 그 자체로 빼어나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등장하는 많은 인물의 개성 있는 캐릭터와 함께 섬세하게 드러나는 감정선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 속으로 저절로 몰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오랫동안 머리에서 공 굴리고 마음속에서 삭히고 삭혀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글이 밀려나올 때 썼음에도 불구하고 버리고 다시 쓰기를 세 번이나 한 작품으로서 매우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하니 더더욱 이 책이 귀해보이며 다르게 보인다.
『깡깡이』가 가진 제목이 무언가 했더니 엄마에 대한 향수요, 가난을 벗어 던지려는 그 시대의 '한'이 담긴 소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그 시대를 그냥 흘러보내지 않고 과거에 속한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 책이라는 공간에 펼쳐놓는 추억의 향연임을 보게 된다.
흰 젓가슴에 대한 얘기는 정말 1970년대 감성으로 볼 때에 분명 피부로 느껴지는 얘기요, 현실적 삶의 언어로서 매우 가치가 높은 그림 언어의 노벨 문학상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는 마스크처럼 두르고 있던 수건과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풀어 몸을 털며 걸어왔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에 낀 토시와 장갑을 벗는데 채 떨어지지 않은 먼지 같은 쇳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우야 안 울었나?" 나를 보며 웃는 엄마 얼굴은 쇳가루가 묻어 이만 하얗게 빛났다. 정희는 그런 엄마가 낯선지 내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가까이 다가온 엄마 몸에서는 녹슨 냄새와 오래된 페인트 냄새가 뒤섞인 매캐하고도 싸한 냄새가 났다. 엄마를 본 동오는 본능적으로 몸을 바둥거렸다. 젖 먹을 걸 아는 것이다. 엄마는 서둘러 겉옷을 벗고 동우를 받아 안으며...사무실 담벼락 한쪽에 돌아앉아 셔츠를 걷어 올렸다. 온모메 검은 쇳가루를 뒤집어썼지만 속옷 안에서 나온 엄마 젖가슴은 닦아놓은 사발처럼 하얬다. 사방에 남자들이 득실거나는 조선소였다. (...) 일하는 사람들 외엔 생명체라곤 보이지 않는 삭막한 조선소와 눈부시에 하얀 엄마의 젖가슴은 너무 생경한 조합이었다."
(...) 동우는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업시 젖을 빨기 시작했다. 나는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엄마 젖을 누군가 훔쳐보는 것 같아 가슴이 졸아들었다. 나는 뒤돌아서 엄마를 가리고 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수평선. 햇살에 부서지는 물비늘. (...) 바다는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막으로 변했다. 금빛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 붉게 빛나는 모래산. (...) '배고픈 아기한테 젖 먹이는게 뭐가 부끄럽다고!'
깡깡이에서 내가 본 최고의 그림 언어로서 매우 강렬하게 다가 왔기에 그 내용을 간추려 적어 보았다. 그 시절의 모습은 지금은 볼 수 없다. 오직 그 시절을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 가치의 추억'을 나는 오늘 소설책 한 권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나도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소와 과거의 보물이 있다. 내가 살던 고향은 낙동강 상류 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하회마을과 가깝다. 백모래가 깔려 있는 그 길을 맨 발로 걸으며, 낙동강 은빛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행복하기 그지 없다. 고흐가 그린 그림보다 더, 누군가 노을을 작품으로 찍은 사진도 내가 살았던 그때의 장면을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아스팔트가 아닌 순수 땅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미류나무가 양쪽으로 둘러싸인 그 길, 그리고 미류 나무 사이에 아카시아가 양쪽으로 피어있는데 그 사이로 지나갈 때의 느낌은 수천억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행복한 나의 추억의 장소이다.
이 책은 그런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부산 아지매의 인생과 저자 자신의 삶의 냄새를 통해 소중한 가족 사랑의 애틋함도 주고 있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건 저자의 향수가 깊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