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가 묻는 말
김미조 지음, 김은혜 그림 / 톡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익살맞은 웃음에 뭉툭하고 긴 나무토막의 코. 멜빵바지에 경쾌하게 걸어다니는 피노키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캐릭터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피노키오의 이미지이다. 워낙 어릴적에 읽었던 동화라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말썽꾸러기 피노키오의 모습 뿐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장난꾸러기 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웠고, 애정이 담긴 눈으로 보게 되었다. <피노키오가 묻는 말>의 피노키오는 '무無'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무기력하고 무감한듯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를 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나 애틋함이 묻어나게 된다. 어쩌면 눈으로 확 느껴지는 그림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맞지 않는 큰 흰색 티셔츠를 삐뚜름하게 입고 맨 다리를 훤 하게 드러낸 피노키오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머리에 쓴 꼬깔모자와 빨간 코는 광대를 연상시키지만 꾹 다물린 입과 축 쳐진 눈꼬리는 즐겁지 않다. 
피노키오가 듣는 말, 피노키오가 묻는 말은 어른이 된 나에게 누군가가 해주는 말 같다. 보지 못했던 것,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짚어보게 한다.

"지금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계속 눈물이 없는 건 아닐 거야. 북소리는 북에 숨겨져 있어. 네 눈물은 네 마음에 숨겨져 있겠지."

슬픔이라는 감정이 표현되지만은 않는다. 가끔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나의 슬픔일때도, 남의 슬픔일때도 있다. 나의 슬픔을 무시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큰 슬픔이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떤 때는 너무 바빠서, 아니면 다른 것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슬픔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는데. 남의 슬픔 또한 그렇다. 웃고 있는 모습이 항상 진심일 수는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웃음에 내가 짐을 더 보탰던 적은 없었는지, 나 자신을 돌이키게 만들었다.

"코가 늘어나는 길이만큼 내 마음도 상처를 입었어요. 가혹한 벌을 받으면 버릇이 고쳐지나요?"

어릴적 혼날때면 나는 울었다. 그럴때면 어른들은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뭐가 억울하다고 울어?'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서럽게 울던 울음을 그치기 위해 끅끅댔다. 그때는 맞는 것이 싫어서, 혼난다는 것에 대한 굴욕감으로 울었다고 생각했다. 피노키오의 말에 나는 내가 상처받았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피노키오의 거짓말에 코가 늘어났을 때 어릴 적 나는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거구나. 그럼 피노키오는 벌을 받아야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단순한 사고였다. 혼나는 것, 벌을 받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그런데 과연 벌은 좋은 방법이었을까? 벌을 피하기 위해 하지 않는 잘못은, 벌이 없다면 저질러질 잘못이 아닌가. 벌이 무섭다는 생각만 했던 단순한 사고에서 더 나아가게 된다. 피노키오가 늘어난 코는 피노키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가혹한 벌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것은 복종과 굴복을 만들 수 있다. 그것으로 잘못을 하지 않게 강제적으로 만들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혼나던 어린 아이에서 이제는 누군가를 혼낼 수도 있는 어른이 된 지금, 체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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