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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나 - 사랑의 여신
무라트 툰젤 지음, 오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터키 문학을 대한 적이 없던 터라 무라트 툰젤의 '이난나'를 읽고 좁게는 터키, 넓게는 오스만 제국의 일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권의 소설을 통해 터키 문화와 그 속에서 살았던 인간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지만 서양 중심의 세계관에 수평 조정 추를 하나 놓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의 책읽기였다.
그리스 신화의 사랑과 전쟁의 신인 아프로디테의 전신인 이난나는 명성(明星. 金星)을 어원으로 하는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미와 연애, 전투의 여신이다. 이난나라는 신이 19세기를 전후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선 오스만 제국의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로 등장하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리고 툰젤은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이난나'라고 했을까.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난 이난나를 만나기를 기대했었다. 소설의 인물이나 배경이 어떤 맥락에서 '이난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 터키 독자들은 이난나와 이야기의 주인공인 젤밀과 빌랄을 어떻게 접목시킬지 궁금했었다.
이교도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성에서 추방당한 제밀과 군대(예니체리)에 강제로 입영되어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빌랄을 중심으로 두 편의 이야기가 서로 번갈아 전개된다. 소설기술 방식부터 기존의 소설과는 달랐다. 하지만 두 편의 이야기는 떠남-순례-투쟁과 갈등-사랑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때로는 수채화를 보듯 인간의 여정과 사랑이 아름다웠고, 또 때로는 인간 군상들이 바로 옆에서 구린 입김을 솟아내듯 비루함이 배어나와 사람 사는 데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처음 장면에서 무르트 둔젤은 나의 관심을 한껏 끌어들였다. 홀수 번호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교도를 사랑한 작은 도련님인 젤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성주와 신하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면서 시작한다. 성주 남편이 작은 아들을 추방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하자 성주의 부인이자 젤마의 어머니인 쉐흐나즈는 차마 아들을 추방할 수 없고 만약 그를 추방시키면 자신은 별채에서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 선언 후에 성주와 가신들의 토론이 이어졌고, 마침내 추방이 결정된다. 추방되어 떠나는 젤마 일행에는 충실한 부하와 부인(술타나)과 이교도 첩(쉬메이라)과,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는 일용품들이 있었다. 터번이나 히잡을 쓰고 말을 올라 탄 젤마 일행의 모습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으로 장사를 하러 온 아라비아 상인들이나 파울로 코옐로의 ‘연금술사’에서 긴 여정을 떠나는 산티아고와 비슷했다. 여러 성주를 만나서 도움을 얻는 과정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의 진미이다.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는 유스프 성주가 돌보고 있는 아시아의 등장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쉬메이라 뿐 아니라 아시아 역시 이난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짝수 번호 이야기는 빌랄이 얼음 속에서 구조되어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의식을 회복한 빌랄이 어릴 때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서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젤마가 개최한 경주에 나가서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사경을 헤매게 된 과정까지의 여정과 사랑을 담고 있다. 이교도들을 잡아다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는 이슬람 군대인 예니체리에 들어간 빌랄은 장군의 첩(누르하알)을 사랑하게 되며 그에게 누르하알은 여신 이난나이다.
첫 3분의 1을 읽는 동안 이슬람 문화의 생경함 때문에 이야기 중심을 잡기가 다소 힘들었다. 그러다 3분의 1선이 넘어가면서 속도가 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쌓이면서 더 산만해지면서 이야기의 흥미는 급격히 떨어졌다. 다소 지리한 묘사장면도 문제지만 속도를 늦춰 읽었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소설가는 작품을 통해 사라진 역사나 사라져가는 현재의 사실을 복원하는 기술자이다. 작가 둔젤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를 독자에게 알려주고자 한 작가의 열정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손실을 가져왔다. 성주 아들 젤마의 여정이 사랑이야기와 중첩되면서 끝까지 읽지 않은 상황에서는 중심을 잃게 되는 단점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두 명의 주인공을 한 편의 소설에 집어넣은 둔젤의 독창적 서술방식도 한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난 후에는 그의 진가가 드러나고 소설구성과 이야기 내용의 탄탄함을 볼 수 있다는 진흙 속의 진주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 전개구성과 여러 가지 터키의 과거와 관련된 내용이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은 소설이다. 한꺼번에 다 읽었지만 차후에 부분적인 내용을 음미하면서 읽어 봐야 할 훌륭한 책이다. 무리트 둔젤을 더 알기 위해 또 다른 그의 소설을 읽고 싶은 맘이 든 것을 보면 이슬람 세계가 서양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서양 중심의 세계보다 우리의 정서와 더 맞다는 생각을 갖게 한 즐거운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