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시대의 이성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2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박남희 옮김 / 책세상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 있는 어떤 책이라도 인간의 생각을 자극하고 반성의 기회를 주며 새로운 생각의 단서가 된다는 것이 평소 독서에 대한 나의 철학이다.  그래서 책을 대할 때는 항상 기뻤고 흥분하였으며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을 받아왔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책이 어렵고 쉽고는 읽는 이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며 읽어서 극복할 수 없는 책은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았다.

이번에 만난 가다머의 ‘과학 시대의 이성’은 이런 나의 신조에 도전장을 던진 책이었다.  근래에 들어 철학 서적을 읽은 경우가 없다보니 책을 읽는 내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장군이 배수진을 쳐서 도망갈 수 없는 필연의 시간을 보내는 느낌을 받았다.  ‘읽기 시작한 이상 질 때 지더라도 적의 힘이라도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각오로 계속 읽었다.

단어와 단어가 난무하고 나의 인식이 따라잡을 수 없는 말과 말의 조합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혔고 난감하였다.  어디에 도대체 실타래의 끝과 끝이 있단 말인가.   읽기를 통해 인식의 희열은 없고 반성만 남을 것인가라는 고민에 쌓여 꾸역꾸역 책을 넘겼다.

이론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실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주장한 가다머는 이해하고 해석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구체적 실천이 곧 철학이라고 하였다.  내 머리에 맴도는 ‘실천’이라는 단어는 ‘과학 시대의 이성’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도구적 이성’이 인간 삶의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고 비난하면서 늘 새롭게 거듭나는 ‘하나로 융합’된 사유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한 가다머의 주장에 백번 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말은 쉽지만 실천이나 현실 적응성은 얼마나 될까라는 회의도 들었다.

철학적 논리에 매몰되어 질질 끌려 다녔던 내가 제4장 ‘실천철학으로서의 해석학’에 이르렀을 때, 눈이 팍 떠였고 마치 낯선 사람과 어색하게 눈을 바라보고 앉은 채 오랜 여행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돌연 상냥하고 예쁜 아가씨와 달콤한 애기를 나누는 즐거움으로 바뀐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해석학이 말하는 텍스트 읽기의 역사와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고대의 해석학이 단순한 ‘기술’에 다름 아니라면 현대의 해석학은 ‘실천철학’으로서 우리가 직접 텍스트 읽기에 참여하여야 하고, ‘텍스트를 말하는 자와 우리가 그것의 고유한 이해 사이에서 성립하는 사태와 연관을 가져야 한다(106쪽)‘고 한다.  글을 해석한다는 말은 글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읽는 자와 쓰는 자의 소통이 단선적인 진리의 1대 1 공유가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유와 작위적 해석이 있다는 뜻에서 충분한 숙고가 따라야 하는 문제임을 다시 한 번 더 느꼈다.  그러므로 ’최종적 해석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 안에 모순을 가진다.  해석이란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115쪽)‘는 말과 ’명백한 해석보다는 우리가 주도하는 관심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115쪽)‘는 말은 실천적이고 다양한 탐구를 철학의 과제로 삼은 가다머의 태도를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지막으로 가다머의 사상에 인상 깊었던 대목은 그가 주장한 언어관이었다.  그는 ‘언어의 이중성, 즉 말해짐과 가려짐을 근거로 언어가 말해지는 사건을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계시와 은폐로 언어를 이야기하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대화를 통해 늘 달리 자신을 실현해가는 운동으로, 그래서 구체적으로 행위를 낳는 힘으로 언어를 본다(186쪽)’

해석학과 언어에 관한 그의 논리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  여러 가지 많은 용어와 주장이 서로 얽혀서 처음에는 정신없이 따라가기 바빴지만 다 읽고 난 뒤 줄 친 부분과 관심 있는 파트를 따로 읽다 보니 사골이 우러나듯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간혹이지만. 

한 차례 소나기를 맞은 듯 글의 조각 속에 흠뻑 젖었던 시간이었다.  참으로 읽기는 즐겁고 재밋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좀 더 선각자들의 사상을 드려다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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