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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 있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19쪽)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가까스로 읽어낸 책이다. 힘겨웠지만 제대로 읽고자 ‘최선을 다했다.’ 정희진, 그녀 표현대로라면 나는 ‘독서’를 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이자 ‘좋은 책’이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발바리 메리, 그 새끼였던 또또, 또삐. 그리고 대학 자취시절 잠시 잠깐 함께 했던 녀석(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에!)이 떠올랐다. 이유불문! 끝내 책임지지 못했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녀석들의 끝을 알기에, 또한 짐작할 수 있기에 아프고 아프다. 지금에서 미안함과 죄책감을 말하는 것도 궁색하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한편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라도 비로소 알게 된 것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몽실이 그리고 가끔 밥을 챙겨주곤 하는 동네 길고양이들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더욱 살피고 보듬고 사랑해야지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옥좼던 모순적 삶의 행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 해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해준 그야말로 ‘인생의 책’이다.
[ 버려진 개 한마리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이야기 ]
시작은 반려견 ‘피피’였다. 작가는 피피와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닌 존재, 나보다 약한 타자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다‘(51쪽)고 말한다. 피피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자신이 타자,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피피가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감정을 가진 하나의 특별한 개체로서 존재함을 깨닫게 되고, 그런 피피에게 생길지 모르는 최악의 미래, 실종 상황에 대비할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유기견의 존재. 그것으로 촉발된 관심이 ‘지금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동물단체 후원, 유기견 구조, 임시보호, 입양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또한 ‘누군가 거두지 않았다면 식용견으로 도살되거나 안락사를 당하거나 길거리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수많은 ‘피피’들에서 시작하여 자신에 대한 성찰, 인간과 동물의 관계, 생명의 가치와 존엄으로 시야와 생각이 확장되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타자가 내게 특별해진 존재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과 일치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상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내 안의 도덕적 한계를 재설정해야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튀어나오는 자기모순을 당혹감에 휩싸여 응시해야 했다.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52쪽)
[ 그 어떤 장소들 ]
작가를 통해 ‘그 어떤 장소들’에 처해 있는 개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의 실상을 여과없이, 가감없이. 반려동물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예쁘고 충실한 견종만 선호하는 사람들. 일부 무책임한 견주들 때문에 길거리에 버려지는 유기견이 정부 공식 통계로만 한해 6만 마리가 넘으며, 그 대부분은 안락사(?!)되거나 식용으로 유통된다. 유기견 문제가 번식견, 식용견 등 다른 여러 문제들과 연관된 악순환 구조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는 가장 나은 처지인 반려동물이자 최악의 처지일 수밖에 없는 식용동물이다. 동종의 동물을 가족이자 음식으로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이 대립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연민을 확장할 수 있을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가장 가까운 동물과 가장 먼 동물 사이의 가교가 되길 바랐다.
우리나라에서 개에 관한 이야기는 번식견, 반려견, 유기견, 식용견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다. 외국의 동물 활동가들이 농장동물, 실험동물, 모피동물, 오락동물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물권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우리나라 활동가들은 개에 관한 이 뫼비우스의 띠에 같힌다.
내가 이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연민을 확장하는 인식의 변화가 어딘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개에 치우친 증언에 그치지 않고 다른 약자, 다른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가기 바란다.” (53~55쪽)
작가는 피피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 대신 자신과 피피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면, 그것은 무엇에서 비롯하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작가는 그 답을 ‘어떤 장소들’에서 찾으려 한다. “새끼 빼는 기계들”이 살고 있는 번식장, “세상의 어떤 개도 팔 수 있다”는 경매장, “버려진 개들의 마지막 정거장”이라는 공설 보호소, “죄 없는 무기수들의 감옥”이라는 사설 보호소. 그리고 “세계에서 유일한” 개농장.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번식장에서는 강아지를 생산한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은 기계지만 번식장에서 강아지를 찍어내는 것은 모성을 가진 엄마 개다. 생명을 다룬다고 해서 여기가 공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엄마아빠 개는 기계보다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65쪽)
거기엔 무수한 생명들이 있다. ‘사람이었으면 벌써 자살했을’ 처절하고 처참한 고통 속의 생명들과 그들을 생명으로 여기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자행하는 (짐승같은) 인간도.
‘짐승 같다’는 표현은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 언어를 다시 곱씹게 된다.
“동물의 행동양식을 부정적으로 의인화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언어에 이르러 경멸적인 비유로 재생산된다. 개처럼 비굴한, 돼지처럼 더러운, 닭처럼 멍청한, 쥐새끼처럼 야비한, 늑대처럼 음흉한, 곰처럼 둔한,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제임스 써펠은 이런 식의 왜곡된 의인화가 인간의 “살생면허”를 정당화한다고 봤다. 인간이 경멸하는 인간의 특성을 동물에게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을 가혹하게 대할 때조차 그 폭력을 합당한 일, 필요한 일, 분수에 맞는 일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28쪽)
또한 작가는 ‘자연사, 안락사, 입양’과 같은 사안과 관련된 언어들이 일부라고 하더라도 현실을 은폐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다. 보호소의 현황을 설명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언어들. 이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적어도 고통의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뒤에 가려진 현실을, 이제는 알고 말았다.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결국 저 언어들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모든 보호소가 인도적인 장소라고, 모든 유기동물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다고 믿게 만든다.” (144쪽)
“언어가 누락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미지가 조장한 허상을 거부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지. 언어인가, 현실인가.
그리고, 개를 먹는다는 것.
“개식용 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개가 축산법에는 포함되면서 축산물 위생관리법에는 포함되지 않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즉 현행법은 개를 사육하는 것만 허용할 뿐 식품으로 도실, 유통, 판매하는 것은 하용하지 않는다.
축산물 위생관리법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 동물에게 투여하는 약물의 기준치와 휴약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유통 경로 확인을 할 수 없는 것, 안전과 위생을 담보할 수 없고 위해가 발생해도 추적할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의미다.
개농장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가진 유일한 시스템, 한번도 연구된 적 없으므로 피해를 관리할 데이터와 기술도 없는 축산 방식이다.” (199~202쪽)
비로소 작가는 알게 된다. ‘그 장소들이 알려준피피와 나의 가장 큰 차이, 나를 피피와 구분 짓고 나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에 대한 아무 비하도 멸시도 없이 말하건대 인간다움’ 임을!
[ 우리의 인간다움 ]
책에는 유기견 그림 연작 <잃어버린 산책>을 낸 조민영 화가가 섬세하게 그린 다섯 마리 개들의 모습이 실렸다.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책 곳곳 밑줄 친 부분을 옮겨본다. 사실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도 모자라다.
“우리가 어떤 폭력과 차별에 처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도덕을 보증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약자의 연대자인 동시에 또다른 약자가 당하는 폭력의 방관자이자 심지어 가담자일 수 있다. 그리고 동물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거의 항상, 그렇다... 우리의 삶은 동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46~48쪽)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49~50쪽)
“한 사회 안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와 동물을 존중하는 태도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인권과 동물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관관계다.” (281쪽)
“우리는 모든 동물 앞에서 강자다. 코끼리나 호랑이 같은 동물도 인간이 지배자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들 앞에서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 동물을 생각하는 일은 약자를,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모순에 눈뜨게 된다. 동물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또 동물의 고통에 반대한다고 해서, 실천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동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눈떠서 잠들 때까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제품이, 동물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84쪽)
“필수적이지 않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동물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289~290쪽)
“모든 사람이 윤리적인 선택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지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질문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응답하는 데에는 아무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나도 결국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글을 썼다.” (295쪽)
감히 인권, 동물권과 같은 말이 사라지길 바란다는 발칙한 말을 던져본다. ‘생명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늘려가려 애써야 함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동기를 부여하는 것, 시작하고 개입하는 것이라 했다. 일단, 이 책을 읽기를! 부디, 제발...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