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 그리고 유홍준. 제목은 물론 저자의 아우라가 상당하다. 절로 주눅이 든다.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해서 추사 김정희, 그의 일대기를 그저 ‘듣는다’ 생각하고 읽어 냈다. 책은 추사의 작품 해설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사진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담겨 있다. 셀 수 없는 많은 걸작을 남긴 추사는 물론 그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저자의 정성과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일컫는 다방면에 뛰어난 추사를 재조명하는 책이다. 하지만 ‘김정희= 추사체’ 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 나오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작품 하나가 없다는 것이 나로선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익히 들어온 서예가 추사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 딱 그만큼이겠다만, 이제야 비로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 어떤 작품도 허투루 볼 수 없었으니. 추사의 예술적 고집과 고뇌, 회한이 글자 한 획 한 획에서 오롯이 느껴졌다. 글자가 살아있다! 사진으로도 그러한데, 실물로 보면 어떨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들끓는다.

다음은 내가 책에서 고르고 고른 추사의 글씨다. 그 어떤 기준도 없는 순전한 개인의 취향되시겠다. 추사의 글씨는 ‘대단히 괴기한 글씨로되 법도에 근거한 파격이고 개성’이었다.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라고. 추사가 바로 그렇다.

아들을 위한 [동몽선습] 1820년(35세) (148~149쪽)
추사가 겨우 네 살인 아들 상우를 위하여 직접 필사하고 발문까지 짓고 보기 좋게 장정하여 한 권의 책을 제본했다. 당시 <동몽선습>은 어린이가 서당에 들어가 처음 배우는 책이라 목판본 책이 아주 흔했다. 그런데도 추사는 아들을 위해 손수 필사해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책 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너는 열심히 읽고 가르침에 따르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한즉 사람의 도에 이를 것이니 열심히 공부할지어다. 때는 정진년(1820) 5월 초승달이 뜬 지 사흘이 지난 날(6일) 아비가 쓰다.’

아비의 애정의 한껏 느껴지며, 추사 해서체의 한 기준작이다. 자식에게 줄 교과서로 쓴 것이기 때문에 그 글씨를 보면 아주 모범적인 해서체로, 필획마다 강철을 오려놓은 것 같은 굳센 힘이 느껴진다. 자신은 개성을 추구하지만 자식은 정도로 가기를 희망하는 아비의 마음이 그렇게 서려 있다.

[반포유고습유 서문] 1843년(58세) (277~278쪽)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를 논함에 아주 좋은 기준작이 된다. 얼핏보면 옹방강, 섭지선의 글씨체와 많이 닮았던 장년 글씨와 비슷하지만 글자에 금석기가 들어가면서 방정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이런 변화가 조만간 우리가 추사체라고 부르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단연 죽로 시옥> 강상시절 (369쪽)
단계 벼루와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 이 셋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조촐한 선비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글씨는 기본이 예서체이지만 자획의 운용에는 전서기가 많이 남아 있다. 글자의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화로 로(爐)자를 쓰면서 불 화(火) 변을 아주 작게 붙인 것에서, 이때부터 추사가 글자 구성에 점점 대담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창다명> 현판 탁본 (373쪽)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 라는 뜻이다. 글 내용이 조용하고 편안한 만큼이나 글씨에도 조촐한 분위기가 있다. 행서 맛을 가미한 예서체로, 글자마다 파격이 드러난다. 작을 소(小)자는 콧수염처럼 돌아갔고 밝을 명(明)자의 날 일(日)변은 큰데 달 월(月)은 작고 획이 삐뚜름하다. 앉을 좌(坐)를 쓰면서 흙 토(土) 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표현한 데에서는 웃음이 절로 난다. 이처럼 추사체 멋으로서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잔서완석루> (375쪽)
풀이하자면 ‘해진 책과 볼품없는 돌이 있는 집’ 쯤 된다. 이 작품은 추사 서예의 최고봉으로까지 평가받는 명작 중의 명장으로,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그 구성이 멋스러우면서도 기발하다. 윗줄은 가지런히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커튼 자락처럼 분방하게 휘날리는 파격을 보여준다.

<산숭해심 유천희해> (510쪽)
불계공졸의 명작. 이 작품은 높이 42센티미터, 길이 420센티미터로 은해사의 ‘불광(佛光)’ 현판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추사 작품 중 가장 크다. 여기서는 진서, 행서, 예서가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아 홀리는 듯한 귀기(鬼氣)까지 느껴진다.

추사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서법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것을 추사 동시대 사람들은 ‘괴(怪)’라고 했다.

한편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어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추사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추사는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그것이 비로소 과천시절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527쪽)

이쯤에서 추사체의 특질에 관한 논의를 끝맺을 수도 있으나 그래도 의문으로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배지에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하필이면 왜 사람들이 괴(怪)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이다. (349쪽)

저자는 동주 이용희 선생님께 묻고 선생님은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말씀하셨는데, 무릎을 치게 하는 탁견이라 감탄했단다. 선생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셔서 그때의 녹음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다. 인간 추사를 그리고 추사체를 이해하게 된 결정적 글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소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와 추사가 자꾸만 겹쳐졌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 전해져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했다.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특이하고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349~350쪽)

‘이처럼 평범한 애기 중에도 사안의 핵심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 깔려’ 있다니!

책에는 그가 쓴 웅장하고 멋스러운 현판, 비문, 편지글 뿐만 아니라 그림도 소개되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적어본다. 추사의 절필이 된 봉은사 <판전> 현판(이 대작은 아무리 봐도 사흘 뒤 세상을 떠날 병든 노인이 감당할 글씨가 아니다.), 묘향산 용연폭포 위쪽에 위치한 <상원암> 현판 글씨, <정부인 광산김씨지묘> 비문, 난초그림,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세한도> 등등. 특히 추사는 유배시절 정말로 많은 편지를 썼는데, ‘편지를 통해 안부와 소식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과 예술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그래서 추사의 편지들은 단순한 안부편지라 해도 글씨도 글씨려니와 문학상이 대단히 높아 그 자체로 예술성을 갖는다.’ (250쪽)

추사의 인간적 면모를 여실없이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또 편지인데, 아내와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252~255쪽) 내용을 보면 ‘추사는 입이 대단히 까다로웠음을 알 수 있고, 한편으로는 대갓집 양반들의 호사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유배 중임에도 당당하게 반찬투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아내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는 것이 인상 깊다. 추사가 한글도 썼다니! 그는 옛날 옛적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괜히 섭섭하고 아쉬웠다. 만약 그가 한글을 한자처럼 ‘그렇게’ 썼다면,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한글서체가 널리 쓰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비록 글씨 쓰는 서예가 추사에 방점을 찍었지만, 책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가만히 따라가보면 그 추사체는 단순히 글씨 쓰는 기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높고 넒음에 감탄과 탄성이 모자라 탄식을 내뱉을 지경에 이르게 되니.
추사 김정희, 이 다섯 글자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어보길!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 있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19쪽)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은 가까스로 읽어낸 책이다. 힘겨웠지만 제대로 읽고자 ‘최선을 다했다.’ 정희진, 그녀 표현대로라면 나는 ‘독서’를 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이자 ‘좋은 책’이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발바리 메리, 그 새끼였던 또또, 또삐. 그리고 대학 자취시절 잠시 잠깐 함께 했던 녀석(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에!)이 떠올랐다. 이유불문! 끝내 책임지지 못했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녀석들의 끝을 알기에, 또한 짐작할 수 있기에 아프고 아프다. 지금에서 미안함과 죄책감을 말하는 것도 궁색하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한편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라도 비로소 알게 된 것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몽실이 그리고 가끔 밥을 챙겨주곤 하는 동네 길고양이들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더욱 살피고 보듬고 사랑해야지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옥좼던 모순적 삶의 행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 해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해준 그야말로 ‘인생의 책’이다.  

[ 버려진 개 한마리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나는 이야기 ]
시작은 반려견 ‘피피’였다. 작가는 피피와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닌 존재, 나보다 약한 타자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다‘(51쪽)고 말한다. 피피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자신이 타자,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피피가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감정을 가진 하나의 특별한 개체로서 존재함을 깨닫게 되고, 그런 피피에게 생길지 모르는 최악의 미래, 실종 상황에 대비할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유기견의 존재. 그것으로 촉발된 관심이 ‘지금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동물단체 후원, 유기견 구조, 임시보호, 입양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또한 ‘누군가 거두지 않았다면 식용견으로 도살되거나 안락사를 당하거나 길거리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수많은 ‘피피’들에서 시작하여 자신에 대한 성찰, 인간과 동물의 관계, 생명의 가치와 존엄으로 시야와 생각이 확장되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타자가 내게 특별해진 존재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과 일치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상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내 안의 도덕적 한계를 재설정해야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튀어나오는 자기모순을 당혹감에 휩싸여 응시해야 했다.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52쪽)

[ 그 어떤 장소들 ]
작가를 통해 ‘그 어떤 장소들’에 처해 있는 개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의 실상을 여과없이, 가감없이. 반려동물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예쁘고 충실한 견종만 선호하는 사람들. 일부 무책임한 견주들 때문에 길거리에 버려지는 유기견이 정부 공식 통계로만 한해 6만 마리가 넘으며, 그 대부분은 안락사(?!)되거나 식용으로 유통된다. 유기견 문제가 번식견, 식용견 등 다른 여러 문제들과 연관된 악순환 구조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는 가장 나은 처지인 반려동물이자 최악의 처지일 수밖에 없는 식용동물이다. 동종의 동물을 가족이자 음식으로 바라보는 상반된 관점이 대립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연민을 확장할 수 있을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가장 가까운 동물과 가장 먼 동물 사이의 가교가 되길 바랐다.
우리나라에서 개에 관한 이야기는 번식견, 반려견, 유기견, 식용견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다. 외국의 동물 활동가들이 농장동물, 실험동물, 모피동물, 오락동물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물권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우리나라 활동가들은 개에 관한 이 뫼비우스의 띠에 같힌다.
내가 이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연민을 확장하는 인식의 변화가 어딘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개에 치우친 증언에 그치지 않고 다른 약자, 다른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가기 바란다.” (53~55쪽)

작가는 피피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 대신 자신과 피피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면, 그것은 무엇에서 비롯하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작가는 그 답을 ‘어떤 장소들’에서 찾으려 한다. “새끼 빼는 기계들”이 살고 있는 번식장, “세상의 어떤 개도 팔 수 있다”는 경매장, “버려진 개들의 마지막 정거장”이라는 공설 보호소, “죄 없는 무기수들의 감옥”이라는 사설 보호소. 그리고 “세계에서 유일한” 개농장.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 번식장에서는 강아지를 생산한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은 기계지만 번식장에서 강아지를 찍어내는 것은 모성을 가진 엄마 개다. 생명을 다룬다고 해서 여기가 공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엄마아빠 개는 기계보다 나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65쪽)

거기엔 무수한 생명들이 있다. ‘사람이었으면 벌써 자살했을’ 처절하고 처참한 고통 속의 생명들과 그들을 생명으로 여기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자행하는 (짐승같은) 인간도.
‘짐승 같다’는 표현은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 언어를 다시 곱씹게 된다.

“동물의 행동양식을 부정적으로 의인화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언어에 이르러 경멸적인 비유로 재생산된다. 개처럼 비굴한, 돼지처럼 더러운, 닭처럼 멍청한, 쥐새끼처럼 야비한, 늑대처럼 음흉한, 곰처럼 둔한,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제임스 써펠은 이런 식의 왜곡된 의인화가 인간의 “살생면허”를 정당화한다고 봤다. 인간이 경멸하는 인간의 특성을 동물에게 투사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을 가혹하게 대할 때조차 그 폭력을 합당한 일, 필요한 일, 분수에 맞는 일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28쪽)

또한 작가는 ‘자연사, 안락사, 입양’과 같은 사안과 관련된 언어들이 일부라고 하더라도 현실을 은폐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진다. 보호소의 현황을 설명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언어들. 이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적어도 고통의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뒤에 가려진 현실을, 이제는 알고 말았다.

“어떤 안락사는 고통사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어떤 입양은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라는 것을’ 결국 저 언어들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모든 보호소가 인도적인 장소라고, 모든 유기동물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다고 믿게 만든다.” (144쪽)

“언어가 누락한 현실을 발견하고 이미지가 조장한 허상을 거부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언어와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지. 언어인가, 현실인가.

그리고, 개를 먹는다는 것.

“개식용 문제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개가 축산법에는 포함되면서 축산물 위생관리법에는 포함되지 않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즉 현행법은 개를 사육하는 것만 허용할 뿐 식품으로 도실, 유통, 판매하는 것은 하용하지 않는다.
축산물 위생관리법에 들어가지 않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국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 동물에게 투여하는 약물의 기준치와 휴약 기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유통 경로 확인을 할 수 없는 것, 안전과 위생을 담보할 수 없고 위해가 발생해도 추적할 수 없는 것을 먹는다는 의미다.
개농장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가진 유일한 시스템, 한번도 연구된 적 없으므로 피해를 관리할 데이터와 기술도 없는 축산 방식이다.” (199~202쪽)

비로소 작가는 알게 된다. ‘그 장소들이 알려준피피와 나의 가장 큰 차이, 나를 피피와 구분 짓고  나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에 대한 아무 비하도 멸시도 없이 말하건대 인간다움’ 임을!

[ 우리의 인간다움 ]
책에는 유기견 그림 연작 <잃어버린 산책>을 낸 조민영 화가가 섬세하게 그린 다섯 마리 개들의 모습이 실렸다.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그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책 곳곳 밑줄 친 부분을 옮겨본다. 사실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도 모자라다.

“우리가 어떤 폭력과 차별에 처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도덕을 보증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약자의 연대자인 동시에 또다른 약자가 당하는 폭력의 방관자이자 심지어 가담자일 수 있다. 그리고 동물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거의 항상, 그렇다... 우리의 삶은 동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46~48쪽)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의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49~50쪽)

“한 사회 안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와 동물을 존중하는 태도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인권과 동물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관관계다.” (281쪽)

“우리는 모든 동물 앞에서 강자다. 코끼리나 호랑이 같은 동물도 인간이 지배자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같은 인간들 앞에서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 동물을 생각하는 일은 약자를,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모순에 눈뜨게 된다. 동물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또 동물의 고통에 반대한다고 해서, 실천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동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눈떠서 잠들 때까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제품이, 동물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84쪽)

“필수적이지 않은 인간의 만족을 위해 동물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장도 왜곡도 없이 동물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 내가 갔던 그 장소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289~290쪽)

“모든 사람이 윤리적인 선택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지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질문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응답하는 데에는 아무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나도 결국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글을 썼다.” (295쪽)

감히 인권, 동물권과 같은 말이 사라지길 바란다는 발칙한 말을 던져본다. ‘생명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늘려가려 애써야 함은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동기를 부여하는 것, 시작하고 개입하는 것이라 했다. 일단, 이 책을 읽기를! 부디, 제발...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작 창비아동문고 292
박하익 지음, 손지희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도깨비폰’이란 단어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자동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나올까? 금 나와라와라 뚜욱딱, 은 나와와라 뚜욱딱’ 도깨비 방망이를 스마트폰으로 바꿔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딱딱 잘 맞아 떨어져 감탄하게 된다.
생각해보라. 스마트폰 세계가 얼마나 이상하고 아름다운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문을 열면,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금은보화는 저리가라, 그보다 더한 볼거리, 놀거리가 쏟아지니 온 몸과 마음이 홀려버리는 건 시간 문제다. 관건은 그곳에서 스스로 나오는 것. 하지만 제 발로 아니 제 손으로 들어갔으나 스스로 나오기가 결코,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상투적이고 관념적인 이 같은 글을 지금 아이들 처지에서 그 눈높이에 맞춰 흥미롭고 재미나지만 제법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다. 현대의 스마트폰과 옛이야기 속 도깨비가 능청스럽고도 천연덕스럽게 어우러진 판타지 동화다. 요즘 도깨비는 ‘촌스러운’ 방망이 대신 스마트폰을 쓴다니! ’스마트폰을 통해 현실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도깨비 세상’ 풍경 묘사는 단연 압권. 깜찍하고 발칙하며 기발하다. 작가의 상상력에 엄지 척!

김서방온, 깜쪽가튼, 꼬부랑캔디, 장원급제, 술술술, 달빛각시탈, 만들고 등은 도깨비폰에 깔리는 앱 이름이다. 각 앱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또한 ‘만리경’ , ‘사천꽃밭’ 은 어떤 사이트일지. ‘날대야’에 이르러서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기발랄 재치와 재미가 주는 감동은 딱 여기까지였으니.

[우리한테 빠져서 벗어나지 못해]

요즘 들어 도깨비폰을 사용하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도깨비폰을 쓸 때는 좋았지만 쓰고 나면 몸이 무겁고 머리가 산만해져서 무언가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도깨비들이 부르는 대로 쫓아다녀야 하니, 잠을 푹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96쪽)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 계속 우리랑 놀려고만 하지. 우리는 사람이랑 노는 걸 좋아해. 인간 중에는 재미있는 애들이 많거든. 그런데 같이 놀던 아이들이 죽어버리면 아주 골치 아파. (116쪽)

애든 어린이든 요즘 인간들은 다 마찬가지야.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지. 자기 혼이 빠져나가도 모른다니까. 생기가 부족해지면 자꾸 딴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지를 못해. 뻔한 생각만 하는 따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거야. 놀 만한 사람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118쪽)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폐단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이들은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을까. 아이들보다 어른들, 특히 부모들이 더 좋아할 작품이겠다. ‘권장도서’로 손색이 없다. 과연 이 책을 마음 놓고 편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하는 삐딱하고 불량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깨비들이 지우를 선택한 이유와 윤진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하지만 명쾌하지 않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기분 별로다.
‘어떤’ 이유로 도깨비 친구가 된 지우와 대조적인 인물로 ‘끼가 넘치고 얼굴도 예뻐서 연예인이 되고 싶은’ 외모와 유행에 관심이 많은 수진이를 등장시킨 점은 영 입맛이 쓰다. (이런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쓰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너무 나갔나?)
작품 속 도깨비도 인정하지 않았는가. 지우는 ‘정말 드문 아이’ , ‘아주 괜찮은 애’라고. 지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깨닫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말 드물고 아주 괜찮은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을 또 하고 말았다.
곳곳에 장착된 재미 요소는 분명 있으나 주인공 지우의 독자적 나홀로 분투기로 여겨지는 이야기는 재미와 흥미를 떨어뜨리니, 아이러니하다.

[마음을 지켜라? 쉽진 않겠지만]

마음껏 놀고 싶었다. 공부니, 성적이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답답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받느라 친구들과 놀기 어려웠다. 방과 후에는 이 학원 저 학원 뿔뿔이 흩어졌다. 가끔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나서 놀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정말 드물었다. 미세 먼지가 심해진 후부터는 더욱 어려워졌다.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는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아야 하고, 미세 먼지 없는 맑은 날이어야 했다. 또 방문 수업과 학원 수업을 모두 마친 다음, 다른 친구들의 일정까지 운 좋게 맞아야 했다. 그런 날은 고작해야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였다. (16쪽)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다. 고백컨대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자 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도깨비폰을 사용하든 안 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깨비 아이들고 놀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중요한 건 마음을 지키고 영혼을 차분하게 다잡는 것이었다.
고요함 속에 깊이 잠겨 마음을 평온히 지킬 수 있다면 도깨비들과 얼마나 어울리든, 도깨비폰을 어떻게 사용하든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185쪽)

마음을 지키는 건... 절대로 쉬운 게 아니야. (18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지켜라! 쉽진 않겠지만...’ 작품의 결론이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외부적, 사회적 맥락을 외면한 채 모든 문제의 원인뿐만 아니라 그 해결 방안 또한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 생각한다. 너무했다. 더구나 이 작품의 대상은 어린이가 아닌가. 치사하고, 비겁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우개 똥 쪼물이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저학년 부문 우수상 수상작 신나는 책읽기 51
조규영 지음, 안경미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호, 지우개 똥으로 좀 놀아봤는데!

이 작가 뭘 좀 안다. 좀 놀아본 모양. 지우개 똥 친구들이 태어난 시간이 다름 아닌 미술 시간이다. 그렇지, 미술용 지우개가 딱이지! 말랑말랑 부드럽고, 쉽게 잘 지워지는 그것. 무엇보다 똥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금방 닳지만 상관없다. 뭉치기에 딱 좋은, 충분한 똥이 만들어지면 그만이니까. 알록달록 색깔 똥도 만들 수 있는데, 거기까진 못했나보다. 교과서나 공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이용하면 된다. 필요한 색이 있는 부분을 지우개로 살살 문지르면 끝.

지우개로 할 수 있는 놀이를 떠올려본다. 난이도 하, 지우개 따먹기. 난이도 중, 끊어지지 않고 길게길게 지우개 똥 빼기. 난이도 상, 지우개로 도장 파기. 하지만 이 놀이들은 감히 명함도 못 꺼낼 터. 지우개를 문지르고 문질러 지우개 똥을 만들고, 그 똥을 다시 꾹꾹 뭉쳐 덩어리를 만든 후, 적당한 손놀림으로 원하는 형상을 빚어, 그에 어울이는 무늬와 모양을 그려넣어야 하는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필요로하는 난이도 최상. 그것이 바로 ‘지우개 똥 친구 만들기’ 다.

작품 속 지우개 똥 친구들 ‘쪼물이, 짱구, 딸꾹이, 헐랭이’를 만든 2학년 아홉살 친구 사총사, 유진, 준서, 다빈, 태우는 조물주, 창조자에 다름 아니니! 쪼물이가 탄생하는 장면에선 성경 창세기 속 일부 구절을 읽는 듯 경건해 진다.

유진이는 연신 지우개 똥을 뭉쳤어. 지우개 똥은 점점 커졌지. 처음에는 쌀 한 톨만 하더니 금세 완두콩 한 알만큼 커졌어. 유진이가 팔과 다리도 만들어 붙였지.
“이제 눈, 코, 입을 그려줄게.”
유진이는 지우개 똥 얼굴에 검정 사인펜을 꾹 찍어 눈을 그려 줬어. 까만 눈이 말똥말똥 빛났지. 이어서 빨간 사인펜으로 큼지막하게 입을 그렸어.
“후우우, 후우우우우”
유진이가 배 속에서부터 깊은 숨을 끌어올려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었어. 지우개 똥은 유진이가 내뱉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 그 순간 지우개 똥 덩어리가 살아났어. 유진이가 불어 준 숨이 지우개 똥의 온몸으로 부드럽게 흘러 발끝까지 찌릿찌릿 가닿았어.
유진이가 지우개 똥을 보며 말했지.
“넌 이제부터 ‘쪼물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13~14쪽)

이렇게 탄생한 지우개 똥 친구 사총사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완두콩만한 녀석들이 선사하는 깨알같은 재미라니! 연신 쿡쿡 웃음이 터진다.

지우개 똥으로 만들어진 사총사. 이제 생존을 위해서 지우개 똥을 먹어야 한다. 지우개 똥은 더이상 똥이 아니다. 밥이다. 감정에 따라 눈물의 맛이 다르듯, 지우개를 쓰는 그 순간 아이들의 기분이 어떠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지우개 가루의 맛이 다름을 알게 된다. 수학시간, 국어시간, 독서록 쓰는 시간 등 각기 다른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우개 가루의 맛은 어떨지 상상해보시라.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깐깐 선생님이 쿵쿵 찍어 대는 울보 도장 때문에 속상하고 슬픈 아이들. 울보 도장을 없애면 아이들도 좋고, 지우개 똥 친구들 또한 맛 좋은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울보 도장과의 대결을 위한 명분이 더욱 확고해졌다. 1차, 2차, 3차전으로 이어지며 점점 변모되고 스케일이 커지는 전투장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고무줄 총’ 그것은 지우개 똥을 활용한 놀이(라 쓰고 ‘장난’이라 읽음) 중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친구와의 다툼, 배고픔, 예상치 못한 적의 출현 등과 같은 그 과정과정 순간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 요소들은 긴장, 흥미 게이지를 한껏 높여준다. 봐도 봐도 재밌다.

유진 - 쪼물이, 준서 - 짱구, 다빈 - 딸꾹이, 태우 - 헐랭이.
지우개 똥 친구들은 아이들의 분신체다. 생김새, 성격까지 꼭 닮았다. 다소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캐릭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에 방점을 찍기로 한다.
무엇보다 앙증맞고 귀여운 캐릭터로 살려낸 그림은 작품에 생동감을 더한다. <돌 씹어 먹는 아이>에 그림을 그린 안경미 작가다. 완전 다른 느낌이라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 상이함과 의아함 또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일터.

막 탄생한 지우개 똥 친구들 그림(19쪽)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4명의 아이들 모습이 담겼던 페이지(9쪽)를 다시 본다. 아,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빈이(딸꾹이)는 여느 작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캐릭터지만, 그림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독자성을 획득했다. 그림책이 아닌 동화책임에도 말이다. 글 작가가 미리 설정한 인물이었을까, 그림 작가가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인물이었을까 진심 궁금하다.

쪼물이, 짱구는 성격이나 외모 등에서 단연 눈에 띄는 주연 캐릭터다. 사건을 만들고, 이끈다. 일명 믿고 보는 캐릭터. 둘의 콤비 플레이, 볼 만 하다. 그리고 헐랭이가 있다. 은근히 신경 쓰이는. ‘얘 어딨지? 뭐하고 있지? 무슨 말을 했더라?’ 다른 캐릭터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아 존재를 재차 확인해야 했던.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하지만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내는. 그래서 대견하고 든든한 그런 친구들이.

지우개 똥 사총사의 맹활약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기분 좋은 변화. ‘따끈한 차를 마신 듯 배 속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울보 도장의 회심의 일격이 남았으니! 1장의 소제목 ‘아이들이 변했다’ 와 그 내용이 전혀 맞지 않다. 내용상 6장에 어울릴 법하다. 아쉽다. 안타깝다. 속상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홉 살 함께 사전 아홉 살 사전
박성우 지음, 김효은 그림 / 창비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 시집 <난 빨강>의 박성우 시인이 글을 썼다. 제목에 ‘사전’이란 말을 달고 있으나, 봄기운 가득한 따듯한 동시집 느낌이다. ‘가까이하다’로 시작하여 ‘화해하다’로 마무리되는 가나다... 순서의 단어들 그리고 그것의 사전적 의미가 씌여 있다. 사전이니까. 하지만 여느 사전에서 볼 수 있는 단어 자체의 활용 예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단어가 아우르는 상황, 느낌, 생각을 담은 짧디 짧은 글을 만날 수 있다. 아주 쉬운 말로, 아홉 살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한번 쯤을 겪어 봤을 소소한 일상이 담겨있다. 앙증맞고 귀여운 그림도 쏠쏠한 재미를 안긴다. 그림을 보고 관련 단어를 짐작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혼자 읽는 것보다 ‘함께’ 이야기나누며 보는 책으로 좋을 듯 하다.

덜컥, 마음에 걸리는 무엇이 있다. 채인선 작가의 <나의 첫 국어사전>은 차치하더라도 최근까지 증쇄를 거듭한 <아름다운 가치 사전>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도, 구성,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 살’에 방점을 찍는다. 대상을 좀더 낮췄고 좁혔다. 해서 글과 내용을 더욱 간결하고 쉽게, 그림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적 캐릭터로, 판형을 작게 해 부담없이 손쉽게 들고 다니며 볼 수 있게 했다. 이것을 작품의 고유한 개성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차별적 요소임엔 분명해 보인다.

9, 아홉은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변곡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라 할 수 있다. <아홉 살 마음 사전> , <아홉 살 함께 사전>은 한 자리 나이의 마지막 일년을 살아내는 녀석들을 향한 힘찬 격려이자 응원의 메시지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