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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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 그리고 유홍준. 제목은 물론 저자의 아우라가 상당하다. 절로 주눅이 든다.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었다. 해서 추사 김정희, 그의 일대기를 그저 ‘듣는다’ 생각하고 읽어 냈다. 책은 추사의 작품 해설집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사진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담겨 있다. 셀 수 없는 많은 걸작을 남긴 추사는 물론 그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저자의 정성과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일컫는 다방면에 뛰어난 추사를 재조명하는 책이다. 하지만 ‘김정희= 추사체’ 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 나오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작품 하나가 없다는 것이 나로선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익히 들어온 서예가 추사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 딱 그만큼이겠다만, 이제야 비로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 어떤 작품도 허투루 볼 수 없었으니. 추사의 예술적 고집과 고뇌, 회한이 글자 한 획 한 획에서 오롯이 느껴졌다. 글자가 살아있다! 사진으로도 그러한데, 실물로 보면 어떨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들끓는다.

다음은 내가 책에서 고르고 고른 추사의 글씨다. 그 어떤 기준도 없는 순전한 개인의 취향되시겠다. 추사의 글씨는 ‘대단히 괴기한 글씨로되 법도에 근거한 파격이고 개성’이었다.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라고. 추사가 바로 그렇다.

아들을 위한 [동몽선습] 1820년(35세) (148~149쪽)
추사가 겨우 네 살인 아들 상우를 위하여 직접 필사하고 발문까지 짓고 보기 좋게 장정하여 한 권의 책을 제본했다. 당시 <동몽선습>은 어린이가 서당에 들어가 처음 배우는 책이라 목판본 책이 아주 흔했다. 그런데도 추사는 아들을 위해 손수 필사해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책 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너는 열심히 읽고 가르침에 따르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한즉 사람의 도에 이를 것이니 열심히 공부할지어다. 때는 정진년(1820) 5월 초승달이 뜬 지 사흘이 지난 날(6일) 아비가 쓰다.’

아비의 애정의 한껏 느껴지며, 추사 해서체의 한 기준작이다. 자식에게 줄 교과서로 쓴 것이기 때문에 그 글씨를 보면 아주 모범적인 해서체로, 필획마다 강철을 오려놓은 것 같은 굳센 힘이 느껴진다. 자신은 개성을 추구하지만 자식은 정도로 가기를 희망하는 아비의 마음이 그렇게 서려 있다.

[반포유고습유 서문] 1843년(58세) (277~278쪽)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를 논함에 아주 좋은 기준작이 된다. 얼핏보면 옹방강, 섭지선의 글씨체와 많이 닮았던 장년 글씨와 비슷하지만 글자에 금석기가 들어가면서 방정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이런 변화가 조만간 우리가 추사체라고 부르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단연 죽로 시옥> 강상시절 (369쪽)
단계 벼루와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 이 셋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조촐한 선비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글씨는 기본이 예서체이지만 자획의 운용에는 전서기가 많이 남아 있다. 글자의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화로 로(爐)자를 쓰면서 불 화(火) 변을 아주 작게 붙인 것에서, 이때부터 추사가 글자 구성에 점점 대담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창다명> 현판 탁본 (373쪽)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 라는 뜻이다. 글 내용이 조용하고 편안한 만큼이나 글씨에도 조촐한 분위기가 있다. 행서 맛을 가미한 예서체로, 글자마다 파격이 드러난다. 작을 소(小)자는 콧수염처럼 돌아갔고 밝을 명(明)자의 날 일(日)변은 큰데 달 월(月)은 작고 획이 삐뚜름하다. 앉을 좌(坐)를 쓰면서 흙 토(土) 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표현한 데에서는 웃음이 절로 난다. 이처럼 추사체 멋으로서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잔서완석루> (375쪽)
풀이하자면 ‘해진 책과 볼품없는 돌이 있는 집’ 쯤 된다. 이 작품은 추사 서예의 최고봉으로까지 평가받는 명작 중의 명장으로,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그 구성이 멋스러우면서도 기발하다. 윗줄은 가지런히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커튼 자락처럼 분방하게 휘날리는 파격을 보여준다.

<산숭해심 유천희해> (510쪽)
불계공졸의 명작. 이 작품은 높이 42센티미터, 길이 420센티미터로 은해사의 ‘불광(佛光)’ 현판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추사 작품 중 가장 크다. 여기서는 진서, 행서, 예서가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아 홀리는 듯한 귀기(鬼氣)까지 느껴진다.

추사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서법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것을 추사 동시대 사람들은 ‘괴(怪)’라고 했다.

한편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어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추사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도 결국은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추사는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그것이 비로소 과천시절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527쪽)

이쯤에서 추사체의 특질에 관한 논의를 끝맺을 수도 있으나 그래도 의문으로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유배지에서 마음을 다스린 결과가 하필이면 왜 사람들이 괴(怪)라고 말하는 형태로 나타났느냐 하는 것이다. (349쪽)

저자는 동주 이용희 선생님께 묻고 선생님은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말씀하셨는데, 무릎을 치게 하는 탁견이라 감탄했단다. 선생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셔서 그때의 녹음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이다. 인간 추사를 그리고 추사체를 이해하게 된 결정적 글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소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와 추사가 자꾸만 겹쳐졌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 전해져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했다.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린 셈이죠. 즉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특이하고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349~350쪽)

‘이처럼 평범한 애기 중에도 사안의 핵심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 깔려’ 있다니!

책에는 그가 쓴 웅장하고 멋스러운 현판, 비문, 편지글 뿐만 아니라 그림도 소개되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적어본다. 추사의 절필이 된 봉은사 <판전> 현판(이 대작은 아무리 봐도 사흘 뒤 세상을 떠날 병든 노인이 감당할 글씨가 아니다.), 묘향산 용연폭포 위쪽에 위치한 <상원암> 현판 글씨, <정부인 광산김씨지묘> 비문, 난초그림,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세한도> 등등. 특히 추사는 유배시절 정말로 많은 편지를 썼는데, ‘편지를 통해 안부와 소식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과 예술을 끊임없이 피력했다. 그래서 추사의 편지들은 단순한 안부편지라 해도 글씨도 글씨려니와 문학상이 대단히 높아 그 자체로 예술성을 갖는다.’ (250쪽)

추사의 인간적 면모를 여실없이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또 편지인데, 아내와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252~255쪽) 내용을 보면 ‘추사는 입이 대단히 까다로웠음을 알 수 있고, 한편으로는 대갓집 양반들의 호사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유배 중임에도 당당하게 반찬투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아내에게 한글로 편지를 썼다는 것이 인상 깊다. 추사가 한글도 썼다니! 그는 옛날 옛적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괜히 섭섭하고 아쉬웠다. 만약 그가 한글을 한자처럼 ‘그렇게’ 썼다면,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한글서체가 널리 쓰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비록 글씨 쓰는 서예가 추사에 방점을 찍었지만, 책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가만히 따라가보면 그 추사체는 단순히 글씨 쓰는 기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높고 넒음에 감탄과 탄성이 모자라 탄식을 내뱉을 지경에 이르게 되니.
추사 김정희, 이 다섯 글자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어보길!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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