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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똥 쪼물이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저학년 부문 우수상 수상작 ㅣ 신나는 책읽기 51
조규영 지음, 안경미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오호, 지우개 똥으로 좀 놀아봤는데!
이 작가 뭘 좀 안다. 좀 놀아본 모양. 지우개 똥 친구들이 태어난 시간이 다름 아닌 미술 시간이다. 그렇지, 미술용 지우개가 딱이지! 말랑말랑 부드럽고, 쉽게 잘 지워지는 그것. 무엇보다 똥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금방 닳지만 상관없다. 뭉치기에 딱 좋은, 충분한 똥이 만들어지면 그만이니까. 알록달록 색깔 똥도 만들 수 있는데, 거기까진 못했나보다. 교과서나 공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이용하면 된다. 필요한 색이 있는 부분을 지우개로 살살 문지르면 끝.
지우개로 할 수 있는 놀이를 떠올려본다. 난이도 하, 지우개 따먹기. 난이도 중, 끊어지지 않고 길게길게 지우개 똥 빼기. 난이도 상, 지우개로 도장 파기. 하지만 이 놀이들은 감히 명함도 못 꺼낼 터. 지우개를 문지르고 문질러 지우개 똥을 만들고, 그 똥을 다시 꾹꾹 뭉쳐 덩어리를 만든 후, 적당한 손놀림으로 원하는 형상을 빚어, 그에 어울이는 무늬와 모양을 그려넣어야 하는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필요로하는 난이도 최상. 그것이 바로 ‘지우개 똥 친구 만들기’ 다.
작품 속 지우개 똥 친구들 ‘쪼물이, 짱구, 딸꾹이, 헐랭이’를 만든 2학년 아홉살 친구 사총사, 유진, 준서, 다빈, 태우는 조물주, 창조자에 다름 아니니! 쪼물이가 탄생하는 장면에선 성경 창세기 속 일부 구절을 읽는 듯 경건해 진다.
유진이는 연신 지우개 똥을 뭉쳤어. 지우개 똥은 점점 커졌지. 처음에는 쌀 한 톨만 하더니 금세 완두콩 한 알만큼 커졌어. 유진이가 팔과 다리도 만들어 붙였지.
“이제 눈, 코, 입을 그려줄게.”
유진이는 지우개 똥 얼굴에 검정 사인펜을 꾹 찍어 눈을 그려 줬어. 까만 눈이 말똥말똥 빛났지. 이어서 빨간 사인펜으로 큼지막하게 입을 그렸어.
“후우우, 후우우우우”
유진이가 배 속에서부터 깊은 숨을 끌어올려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었어. 지우개 똥은 유진이가 내뱉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지. 그 순간 지우개 똥 덩어리가 살아났어. 유진이가 불어 준 숨이 지우개 똥의 온몸으로 부드럽게 흘러 발끝까지 찌릿찌릿 가닿았어.
유진이가 지우개 똥을 보며 말했지.
“넌 이제부터 ‘쪼물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13~14쪽)
이렇게 탄생한 지우개 똥 친구 사총사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완두콩만한 녀석들이 선사하는 깨알같은 재미라니! 연신 쿡쿡 웃음이 터진다.
지우개 똥으로 만들어진 사총사. 이제 생존을 위해서 지우개 똥을 먹어야 한다. 지우개 똥은 더이상 똥이 아니다. 밥이다. 감정에 따라 눈물의 맛이 다르듯, 지우개를 쓰는 그 순간 아이들의 기분이 어떠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지우개 가루의 맛이 다름을 알게 된다. 수학시간, 국어시간, 독서록 쓰는 시간 등 각기 다른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우개 가루의 맛은 어떨지 상상해보시라.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깐깐 선생님이 쿵쿵 찍어 대는 울보 도장 때문에 속상하고 슬픈 아이들. 울보 도장을 없애면 아이들도 좋고, 지우개 똥 친구들 또한 맛 좋은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울보 도장과의 대결을 위한 명분이 더욱 확고해졌다. 1차, 2차, 3차전으로 이어지며 점점 변모되고 스케일이 커지는 전투장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고무줄 총’ 그것은 지우개 똥을 활용한 놀이(라 쓰고 ‘장난’이라 읽음) 중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친구와의 다툼, 배고픔, 예상치 못한 적의 출현 등과 같은 그 과정과정 순간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 요소들은 긴장, 흥미 게이지를 한껏 높여준다. 봐도 봐도 재밌다.
유진 - 쪼물이, 준서 - 짱구, 다빈 - 딸꾹이, 태우 - 헐랭이.
지우개 똥 친구들은 아이들의 분신체다. 생김새, 성격까지 꼭 닮았다. 다소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캐릭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에 방점을 찍기로 한다.
무엇보다 앙증맞고 귀여운 캐릭터로 살려낸 그림은 작품에 생동감을 더한다. <돌 씹어 먹는 아이>에 그림을 그린 안경미 작가다. 완전 다른 느낌이라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 상이함과 의아함 또한 그림이 주는 즐거움일터.
막 탄생한 지우개 똥 친구들 그림(19쪽)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4명의 아이들 모습이 담겼던 페이지(9쪽)를 다시 본다. 아,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빈이(딸꾹이)는 여느 작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캐릭터지만, 그림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독자성을 획득했다. 그림책이 아닌 동화책임에도 말이다. 글 작가가 미리 설정한 인물이었을까, 그림 작가가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인물이었을까 진심 궁금하다.
쪼물이, 짱구는 성격이나 외모 등에서 단연 눈에 띄는 주연 캐릭터다. 사건을 만들고, 이끈다. 일명 믿고 보는 캐릭터. 둘의 콤비 플레이, 볼 만 하다. 그리고 헐랭이가 있다. 은근히 신경 쓰이는. ‘얘 어딨지? 뭐하고 있지? 무슨 말을 했더라?’ 다른 캐릭터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아 존재를 재차 확인해야 했던.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하지만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내는. 그래서 대견하고 든든한 그런 친구들이.
지우개 똥 사총사의 맹활약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기분 좋은 변화. ‘따끈한 차를 마신 듯 배 속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울보 도장의 회심의 일격이 남았으니! 1장의 소제목 ‘아이들이 변했다’ 와 그 내용이 전혀 맞지 않다. 내용상 6장에 어울릴 법하다. 아쉽다. 안타깝다.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