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우리에게 기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 온다면 텔레비젼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들 앞에서 술따르고 노래하고 춤추던 천인이라 말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여러가지 이유에는 일제 감정기를 그치며 일본은 우리 기생을 창기라는 측면을 왜곡하여 부각시키고 우리 스스로 기생에 대해 천시대하는 문화가 잇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기생이 일제 감정기 우리 문화와 사회 그리고 예술분야에 이르기까지 선구자적인 역할에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제 감정기시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명기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22년 야구 시범경기를 위해 방한한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에게 검무 승무 사고무 등 우리의 춤사위를 선보이고 음악을 들려주는 등 조선의 문화홍보 대사로서의 명월관 기생들 1930년 레코드 음악의 황금기에 '유행가의 여왕'이라 불린 평양 기생 왕수복 여성으로서 최초로 영화배우가 된 이월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상 기생이 된 현계옥등 물산 장려 운동,토산 장려 운동,자선행사,기부등의 사회 운동을 펼침 동래 권번 기생들 광고,그림,사진 모델,파업 노동 운동등 1920-1930년대 기생은 근대 대중 문화를 주도 한 선구자이며 사회 문제에도 자각한 신여성이기도 햇다. 일제 감정기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 예술의 계승자는 권번의 기생밖에 없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무와 소리를 젤 먼저 익혔고 시대에 맞게 서양 악기와 사양춤을 배운 종합 예술인임에 틀림없었다. 기생은 종합 예술인이었지만 봉건 사회의 첨민이었고 평생 사회적 편견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기에 우리 전통 예술의 계승자였지만 게승 주체가 기생이었기에 왜곡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기생을 길러내는 기생 학교를 보면 국내외 적으로 아주 유명한 평양 기생 학교가 있엇다. 그 곳에서 예악의 기술을 닦은 기생들은 출신 지역별로 조합을 이룬 권번으로 들어가게 된다. 권번은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매니지먼트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기생을 관리하고 요청에 따라 기생을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그리고 전통 예능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일제 감정기 시대 기생들은 우리 문화의 계승자이며 연예인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문화의 상당 부분이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기생을 천시 여기기엔 그들이 사회 문화적으로 공헌함이 너무나 크다. 그들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