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지 150년 가까이 되는 지금, 진화론은 새로운 변혁을 맞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생물학자들에 의해 학문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진화론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생물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윤리학 등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이른바 학문이라는 서말의 구슬을 꿸 수 있는 요긴한 실과 바늘로 자리매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의 광범위한 적용은 예상 가능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이 비판에 맞서 신선한 대답을 던져주어야할 당사자들은 어째 150년 전과 동일한 대답을 반복하는 듯 하다. 이번 호 대학원신문은 지난 호에 이어 다위니즘의 현재성을 사회생물학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그리고 다위니즘의 논쟁적인 대답들이 어떻게 비판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다위니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편집자> |
생물학의 결정론과 환경론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양육 환경이 좋더라도 출신의 근본은 속일 수 없다는 의미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근본은 보잘것없지만 당사자가 자수성가했을 때 흔히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두 속담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생물학계에서 치열하게 논의되었던 두 관점, 즉 결정론(determinism)과 환경론(environmentalism)을 각각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정론이란 생물체의 모양, 습성, 행동 등을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주장이다. 환경론이란, 물론 그런 천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태어난 이후 성장할 때의 주변 환경에 의해서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결정론과 환경론의 대립은 사실상 인류 역사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흑백 인종차별과 히틀러의 순혈주의가 결정론적 주의(主義)에 근거한 것이라면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교육평등 주장은 환경론에 뿌리를 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정론은 20세기 들어서 다시 유전자결정론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부모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비밀이 유전자(게놈)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다윈 진화론이 “생물의 대부분 형질이 유전된다”고 주장했고 이후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유전자결정론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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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도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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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결정론이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된 데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친 과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최우선으로 들 수 있겠다.
도킨스는 1976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40억년 전 스스로 복제본을 만드는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고대 복제자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그 복제자는 절멸하지 않고 생존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 복제자는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 이제 복제자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지어서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룬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으며, 그것을 보존하는 것만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기계이다.”
도킨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며, 그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의 모든 생존 행위는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유전자 자체의 이기적(利己的)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돕는 이타적(利他的) 행동 역시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 수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현상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뿐만 아니라 세대간, 그리고 암수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기적 유전자들은 자기복제를 위해서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도킨스는 설명한다.
사회생물학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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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슨의 '사회생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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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도킨스가 영국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을 들고 나왔을 때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사회생물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타고난 종합가라고 할 수 있는 윌슨은 당시의 동물행동학 연구에 커다란 회의를 품었다. 자연에서는 침팬지들이 사냥에서 획득한 먹이를 집단 내의 다른 침팬지들에게 나누어준다든지, 또는 같은 집단 내의 다른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든지 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동물행동학은 기껏해야 그런 행동이 전체 집단을 위한 개별 개체들의 희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윌슨은 그런 이타적인 행위조차도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적인 행동으로 해석하였다.
윌슨이나 도킨스는 모두 동물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진화와 유전자의 영향력에 주목했다. 그런데 도킨스가 유전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주로 관심을 두었다면 윌슨은 그런 유전자의 진화로 나타나게 된 사회 현실, 즉 동물과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학적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연구의 중점을 두었다. 윌슨은 이런 자신의 시도에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행동의 대부분은 각 개체들에 내장된 유전자들에 의해서 통제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개미들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고도의 분업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행위나 최고의 배우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컷끼리 생명을 걸고 혈투를 하는 행동 등이 모두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유하는 유전자를 보다 많이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등장한 이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이유는 분명하다(1975년 이후 30년 동안 사회생물학을 주제로 해서 발간된 책만 해도 수백 권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우리 인간도 동물계의 일원이 분명한 바, 인간이라고 해서 사회생물학이 제시하는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은 가능한가?
윌슨의 사회생물학 이론은 남녀간의 분업, 부모자식간의 유대, 가까운 친척들에게 행하는 고도의 이타성, 근친상간 기피, 이방인에 대한 의심, 부족주의, 집단 내 순위제, 남성 지배 등 많은 사회적 관습들이 사실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결정에 관계하는 심리적 본성의 근본은 우리 몸속에 깃들어있는 유전자라는 것이 윌슨의 주장이다.
이런 윌슨의 관점은 1998년 <컨실리언스: 지식의 통합>이라는 저작의 발간으로 다시 한 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통섭으로 번역되었던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에서 윌슨은 인류 역사를 “이제까지 별개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추구되었던 미지에 대한 탐구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서로 통합되어 새로운 세계 탐구를 도모하게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획득한 지식은 대부분 전문화 과정을 통해서 얻어졌다. 그 결과 제반 지식이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순수과학, 예술 등으로 구분되고 다시 무수히 많은 전문 분야들로 가지치기했던 나머지 이제 지식의 통합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서 윌슨은 제반 지식의 통합 가능성을 엿보는데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통합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설파한다. 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의 지원 없이는 더 이상 수행될 수 없으며 물리학 또한 생물학의 영역을 넘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추세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째서 자연과학과 인문학과 예술 통합 역시 가능하지 않겠는가? 윌슨은 이미 자연과학이 심리학과 인류학, 사회학 등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또 예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과학의 예술에 대한 기여는 단적으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윌슨은 진화생물학이 지식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가 제아무리 우월하고 우리의 심령이 제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결국 우리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으며 우리 몸 역시 생물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 진화생물학은 사회과학에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두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두뇌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는지 등에 대한 탐구는 곧 생물학의 영역이자 심리학과 인류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윌슨의 통섭론 입장에서 본다면 앞으로 과학은 점점 더 인간 본성의 이해에 더 많이 기여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화생물학이 21세기 과학 발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을 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