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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ㅣ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창비 에세이앤 시리즈의 세번째 책, 이혜미 시인의 <식탁 위의 고백들>을 읽었다.
쨍한 연두색의 표지가 강렬하면서도 예쁘다는 게 첫인상이었고,
정말 절묘한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식사는 일종의 제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일련의 행동을 거쳐 음식을 입에 넣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나눠먹는다는 것은 큰 의미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사이는 아주 각별하고, 먹는 것도 꼴보기 싫어졌다면 이미 그사람에 대한 마음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식탁 위의 고백들’이라니.
남을 위해, 또 나를 위해 준비된 음식은 고백일 수밖에 없구나.
점점 더워지는 날씨의 초입에서 또 하나의 표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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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간 여름 과일
‘여름의 무른 눈가들’ 파트에서는 복숭아, 무화과, 자두에 대해 얘기한다.
복숭아에 대해 얘기할 땐 이 과일을 특히나 사랑하는 친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한입 베어물면 팔꿈치까지 과즙이 흘러내리는 물복 중의 물복을 선호한다는데, 나는 이가 깨져도 딱복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실 복숭아라면 가리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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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져나가는 달콤함. 복숭아를 생각하면 조금만 스쳐도 멍들 준비가 된 육체 같고 언제든 손목을 타고 흐를 소문 같아서 극도의 예민함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느다란 솜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린 작고 유약한 짐승.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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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단의 음식, 카레
‘카레에 관한 열두개의 메모’ 파트를 읽다보면, 초저녁의 골목길에 퍼진, 거부할 수 없는 음식 냄새들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집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자박한 김치찜, 그리고 낯설고도 익숙한 향신료의 카레 냄새.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생긴 향수는 어느날 저녁 무자비하게 후각을 자극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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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를 만드는 것은 외따로 떨어진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어떻게든 이음새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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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를 먹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 그게 좋은 점이다.
개인적으로 카레를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먹는 때는 언제나 될 수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3. 더위를 먹지 말고 까눌레를
사실 까눌레는 나에게 낯선 디저트다.
단 걸 워낙 좋아해서 마카롱, 머핀, 타르트, 휘낭시에, 마들렌 이런 건 앉아서 한 박스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무수한 카페/베이커리를 가봐도 까눌레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레시피를 보고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품이 굉장히 많이 든다.
반죽을 하루동안 숙성시키고, 럼주를 넣어야 하며, 바닐라빈도 긁어 넣고. 이때 바닐라 액스트랙은 안 된다고 한다.
지금 반죽 만들어서 지금 구워내고 싶은 나의 성미와는 정반대의 디저트가 바로 까눌레인 것이다.
그에 반해 작가의 문장은 굉장히 긍정적인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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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구워내기 위해 오늘 미리 반죽을 만들어두는 건 꽤 기대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다음 날을 위한 기약과 유예의 즐거움.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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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렇게 내 얘기를 많이 쓸 생각도 없었고, 길게 쓸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내 기억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쓰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게 신기했다.
이 에세이는 나로 하여금 나만의 에세이를 쓰게 만든 셈이었다.
과일과 카레, 그리고 까눌레를 함께 먹는 어떤 하루가 찾아올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날은 어쩐지 특별한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혼자 먹어도 혼자 먹는 것 같지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어린 시절의 나, 어떤 전형에 떨어진 고삼의 나, 열여섯의 나와 함께 먹는 것들.
그것은 운동장 한 켠 그네 아래 깊은 모래구덩이에 숨겨둔 타임캡슐을 여는 기분과 비슷할까?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쓰여졌습니다.
#에세이앤 #에세이앤시리즈 #식탁위의고백들 #에세이
퍼져나가는 달콤함. 복숭아를 생각하면 조금만 스쳐도 멍들 준비가 된 육체 같고 언제든 손목을 타고 흐를 소문 같아서 극도의 예민함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느다란 솜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린 작고 유약한 짐승. - P57
카레를 만드는 것은 외따로 떨어진 세계의 조각들을 모아 어떻게든 이음새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 P152
내일 구워내기 위해 오늘 미리 반죽을 만들어두는 건 꽤 기대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다음 날을 위한 기약과 유예의 즐거움.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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