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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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거시기 머시기>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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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표현이 말을 가둘 때가 있고, 이미지보다 글이 앞지를 때도 있다. 어떤 공연은 대본보다 못하고 또 한 마디의 음악이 천 가지의 감정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중요하다. 표현을 ‘퉁치는’ 것은 세계가 좁아져간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에서 누군가의 첫인상을 판단하고 그가 고른 단어에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말이란 얼굴과 같은 것이다.

책 서문에는 제목 ‘거시기 머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실려있는데, 이는 어떤 표현을 퉁치고 뭉개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애매어ambiguity로써 ‘흑백의 경계를 넘어선’ 말이다. 거시기와 머시기는 다양한 의미가 교차되는 장소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다양한 ‘거시기’를 ‘머시기’로 나타내기 위해 매순간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를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모든 사람이 거시기하여 기립 박수를 받을 수 있는 머시기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누구나 다 거시기를 머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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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의 어느 날 비보를 들었던 순간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릴 때 이른바 ‘독서 캠프’라는 것을 했는데, 매달마다 선생님이 자신의 입맛대로 고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와야 했다. 그 중에 이어령 선생님의 책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가득 담겨 있는 책이 첫만남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 이미지를 안고 있었다.

이 책을 처음 펼치면 날개 빼곡히 작가의 생애가 작혀 있는데. 문장 하나에 담긴 여럿의 발자국이 새삼 무겁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는 어려워서, 잘 몰라서 느끼지 못했던 격동과 변화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것들을 아주 당연히 영위하고 있다. 나는 저 멀리 앞서 걸어간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책을 펼쳤다. 당연하되 따뜻하고, 그러나 매순간 밀도를 잃지 않는 문장들이 그 걸음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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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8번의 강연(좌담회, 연설 등)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게 특히 와닿았던 것은 시인들과 나눈 좌담회의 내용이었다. 대중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대한 고민은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고야 있었지만, 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Sun’과 ‘Son’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이렇듯 표현이 가진 양의성과 애매성의 효과를 제거하는 식으로 견제받았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하고, 그 흐름은 사회의 변화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작가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언어와 문장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언어의 적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만약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거시기’와 ‘머시기’는 그 자신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잃고 그저 표현을 퉁치는 데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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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letter는 항상 한 걸음 느리다. 언제 우리에게 도착할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언제나 왜곡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깨달음의 순간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해 고찰을 거듭하는 것은 이러한 지연과 오차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일까? 나는 이미 답변으로 주어진 ‘거시기를 머시기한다’는 것을 고민한다. 그 의미는 이미 말보다 느린 상태지만, 언젠가 내게 올 것이다. 언어가, 결국 내게 도착하리라고 믿는다.

- 이따금 탕자가 돌아오듯이 나는 떠나온 문단의 내 빈방으로 돌아올 때가 있지요. 그때 나는 여러분들처럼 생생한 생채기가 있는 시를 읽게 되고, 그러면 마치 은성한 잔칫상으로 날 맞이해주고 있는 것 같아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121쪽)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시기하여 기립 박수를 받을 수 있는 머시기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누구나 다 거시기를 머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1

이따금 탕자가 돌아오듯이 나는 떠나온 문단의 내 빈방으로 돌아올 때가 있지요. 그때 나는 여러분들처럼 생생한 생채기가 있는 시를 읽게 되고, 그러면 마치 은성한 잔칫상으로 날 맞이해주고 있는 것 같아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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