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헬스케어로 다시 쓰는 의료·제약·바이오 산업 - 헬스케어의 변화부터 원격 의료, 웨어러블, 가상현실, 제약·바이오 혁신까지
최경환 지음 / 비제이퍼블릭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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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헬스케어로 다시 쓰는 의료 제약 바이오 산업』 독서노트

디지털 기술이 의료를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가. 『디지털 헬스케어로 다시 쓰는 의료 제약 바이오 산업』은 이 질문에 “의료·제약·바이오”라는 전통적 산업 구획 전체를 가로지르는 시선으로 답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디지털 헬스케어를 하나의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데이터·플랫폼·규제·비즈니스 모델이 얽힌 사회기술적 전환으로 읽어내며, 의료를 둘러싼 권력과 책임, 공공성과 시장의 지형이 어떻게 다시 그려지고 있는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병원에서 데이터 인프라로: 의료의 탈영토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서사는 “병원 중심 의료에서 데이터 인프라 기반 의료로의 전환”이다. 의료는 더 이상 병원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만 완결되는 서비스가 아니다. 진단, 치료, 추적 관찰, 재활, 예방은 전자의무기록(EHR), 클라우드, 모바일 앱, 웨어러블 센서, 원격 모니터링 시스템 등 디지털 인프라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연속적 과정으로 재구성된다.


이를 “의료의 탈영토화”라 부를 수 있다. 의료 행위의 중심이 병원의 진료실과 병동에서 벗어나, 데이터가 생성·저장·분석·재사용되는 네트워크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료의 주체 역시 재배치된다. 의사와 환자의 1대1 관계를 전제로 하던 고전적 의료 모델은, 데이터 생산자·플랫폼 운영자·제약·보험·규제기관이 참여하는 다자적 네트워크로 치환된다. 책은 이러한 전환을 기술 낙관론이나 규제 비판에만 기댄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구조적 변동에 대한 일종의 “지도 그리기”로 제시한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세 축: 유전체, 웨어러블, 원격의료

책은 디지털 헬스케어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축을 배치한다. 유전체 데이터와 정밀의료, 웨어러블 디바이스, 그리고 원격의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 요소를 나열형으로 소개하는 대신, 하나의 연결된 가치사슬로 엮어낸다는 데 있다.

첫째, 유전체 데이터와 정밀의료는 치료 패러다임의 전환을 상징한다. 정밀의료는 평균적인 환자를 전제하는 기존의 접근에서 벗어나, 개인의 유전자 정보, 생활습관, 환경 요인을 통합해 “나”에게 최적화된 치료 전략을 설계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항암제와 같이 효과와 부작용의 편차가 큰 영역에서, 유전체 데이터와 실제 진료 현장에서 축적되는 리얼월드데이터가 결합되면서, 제약·바이오 기업의 임상시험 설계, 적응증 확장, 약물 재창출 전략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책은 보여준다.


둘째,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몸에 부착된 센서”를 넘어, 일상 속 데이터 인프라로 기능한다. 스마트워치, 스마트 링, 연속혈당측정기(CGM), 패치형 센서는 심박수·수면 패턴·혈당·활동량 등 연속적인 생체 데이터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이 데이터는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만성질환 관리, 응급 모니터링, 디지털 치료제와 결합되며 새로운 시장을 열어간다.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 판매에서 데이터 기반 구독형 서비스와 플랫폼 비즈니스로 수익 구조가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제약·보험·IT의 경계는 이 지점에서 흐려진다.


셋째, 원격의료는 치료의 장을 병원 밖으로 확장한다. 웨어러블로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하고, 인공지능이 이상 징후를 감지하며, 필요한 시점에 의료진이 원격으로 개입하는 구조가 구축되면서, 특히 당뇨·심부전 같은 만성질환 관리의 패턴이 바뀐다. 병원 방문과 응급실 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진료는, 환자의 생활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속적 관리”로 전환된다. 여기서 원격의료는 화상통화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데이터 인프라를 매개로 의료 행위가 탈영토화되는 대표적 장면으로 읽힌다.


세 축은 이처럼 분할된 기술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가치사슬이다. 유전체·정밀의료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웨어러블은 “어떤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원격의료는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료를 제공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이 세 요소가 연결될 때 비로소 산업 생태계로서 완성된다.

2026년의 현재: 디지털 치료제(DTx)의 부상

2024년 출간 당시 이 책이 제시한 비전은, 2026년 현재 상당 부분 구체적인 시장과 제도로 구현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디지털 치료제(Digital Therapeutics, DTx)다.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질환을 예방·관리·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는, 책이 그려놓은 가치사슬의 실체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정밀의료가 정의한 목표, 웨어러블과 앱이 수집한 데이터, 원격의료 인프라가 제공하는 서비스 채널이 결합되어 하나의 “디지털 약”으로 구현된 것이다.


글로벌 DTx 시장은 2020년대 중반 이후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하며, 2025년 약 100억 달러 규모에서 2026년 120~140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당뇨병 관리, 불면증, 뇌졸중 재활 등을 겨냥한 DTx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으며, 제도권 의료 안으로 서서히 편입되는 중이다. 미국의 게임 기반 ADHD 치료제, 독일·영국의 수면·정신건강 DTx, 한국의 수면·재활 분야 제품 등은, 단순한 “앱”을 넘어, 규제와 보험, 임상근거라는 전통적 의료의 필터를 통과한 새로운 치료 옵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DTx는 이 책이 포착한 의료의 탈영토화와 데이터 인프라 기반 의료의 전환이, 더 이상 미래 시제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진료실 안에서 처방되지만, 그 효과는 환자의 집과 일상에서 발생한다. 소프트웨어는 병원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환자의 스마트폰과 웨어러블을 통해 “치료의 장소”를 재구성한다.

규제와 보험: 공공성과 시장 사이에서

디지털 헬스케어의 확산을 가로지르는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 규제와 보험 제도이다. 이 책은 규제를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공공성과 산업성을 동시에 조율해야 하는 제도적 장치로 바라본다. 이는 2026년 현재의 정책·제도 논의와도 정확히 맞물린다.

한국은 인공지능·디지털 의료기기 특성을 반영한 별도의 법·제도틀을 마련하며, 허가 절차를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있다. 그러나 규제 완화만으로 시장이 자동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동시에 확인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와 원격의료 서비스가 실제 의료 현장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임상적 유효성과 비용 효과성을 입증하고, 이를 건강보험 급여 체계 안에 어떤 형태로 편입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독일의 DiGA 제도처럼, 디지털 치료제를 공식 의료체계 안에 포함시키고, 일정 기간 동안 실사용 데이터(real-world evidence)를 통해 유효성과 비용효과성을 평가한 뒤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모델은 하나의 참고점이다. 한국 역시 비급여로 시작해 제한적·조건부 급여 등 다양한 수단을 논의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혁신”과 “재정 건전성” 사이의 균형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제도적 갈등을 “규제 vs 혁신”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 대신, 공공성과 산업성 사이에서 책임과 위험을 나누는 문제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데이터 주권과 윤리: 탈영토화의 어두운 이면

의료의 탈영토화가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병원 안에 머물던 기록이 데이터 인프라와 플랫폼을 타고 이동하면서, 데이터 주권과 윤리적 쟁점은 디지털 헬스케어의 가장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다.

첫째, 건강데이터의 소유와 통제 문제이다. 진료기록, 유전체 정보, 웨어러블과 앱이 수집한 라이프로그는 환자 개인의 삶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의사의 판단과 기록, 병원의 시스템, 알고리즘 개발자의 설계가 개입된 복합적인 산물이다. 이 데이터에 대한 “주권”을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부여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법적 소유권을 넘어서, 보호·이용·이익 분배라는 정의의 문제로 확장된다.


둘째, 알고리즘과 편향의 문제이다. 인공지능 기반 건강위험 예측과 맞춤형 치료 추천은 특정 집단의 건강 격차를 줄이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편향된 데이터셋과 불투명한 알고리즘 설계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낙인을 낳을 수 있다. 예측 도구의 점수가 보험료, 고용, 신용 평가 등 다른 영역으로 확산될 경우, 건강데이터는 개인에게 평생 따라붙는 “낙인”이 될 위험을 안고 있다.


셋째, 디지털 격차와 데이터 배제이다. 스마트폰·웨어러블·네트워크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집단은 건강데이터 생산 과정에서 배제되고, 디지털 헬스케어가 약속하는 이익과 편의를 충분히 누리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료의 탈영토화는 기존의 공간적·계층적 불평등 위에 새로운 데이터 기반 불평등을 덧씌울 위험을 지닌다.


이 책은 이러한 어두운 면을 길게 파고들지는 않지만, 프라이버시 보호, 데이터 거버넌스, 알고리즘 투명성, 디지털 리터러시, 공공 인프라의 역할 등 핵심 키워드를 통해, 독자가 더 깊은 윤리·정의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지목한다. 북리뷰에서라면, 바로 이 지점을 디지털 헬스케어의 정치철학적 쟁점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비평적 개입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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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쾌락과 행복 ㅣ 북커스 클래식
에피쿠로스 외 지음, 유원기 옮김 / BOOKERS(북커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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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오랫동안 ‘쾌락주의자’라는 단선적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다. 그를 떠올리면 대개 감각적 향락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먼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행복』에 실린 네 편의 핵심 텍스트―「에피쿠로스의 생애」,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퓌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메노케이오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런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책은 에피쿠로스를, 쾌락을 말하면서도 절제와 검소, 평정과 우정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사상가로 다시 불러낸다. 어쩌면 독자는 곧, ‘쾌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요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생애에서 철학으로: 한 인간, 한 시대]
책의 첫 부분을 차지하는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사모스 섬 출생부터 아테네 ‘정원’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한 철학자의 삶을 시대적 격변과 함께 생생하게 그려낸다. 헬레니즘 제국이 형성되며 폴리스 질서가 해체되던 혼란의 시대에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것은 정치적 영광도, 거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도 아닌 개인의 평안과 행복이었다. 이 전기적 서술 덕분에, 뒤따르는 편지들은 단순한 교의의 나열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 동료들에게 보내는 실천적 조언으로 읽힌다. 오늘을 사는 독자 역시,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철학은 어디에서, 어떤 삶의 상황에서 시작되는가”를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헤로도토스에게: 자연학이 여는 평정]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피쿠로스는 원자론적 자연학을 간결하게 정리하며 우주와 자연의 구조를 설명한다. 여기서 물리학은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두려움을 해체하는 치유의 지식이다. 자연은 신의 분노나 기분에 좌우되는 무대가 아니라 일정한 질서와 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이며, 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은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로 이어진다. 신과 죽음, 운명에 대한 미신적 상상을 걷어내는 이 자연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떠올리게 하며 “지식이 우리를 어느 지점까지 위로할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퓌토클레스에게: 하늘을 읽는 지혜]
「퓌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천문과 기상, 다양한 자연현상을 다루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에피쿠로스의 관심은 정밀한 과학 모델을 세우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하늘과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이해 가능한 세계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다. 번개, 비, 일식 같은 현상을 신의 징벌이나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던 미신은 합리적 설명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이 편지를 읽다 보면, 독자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현상을 여전히 ‘불안한 징후’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불안과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텍스트 곳곳에서 작은 사례로 증명된다.

[메노케이오스에게: 쾌락, 욕망, 행복의 윤리학]
가장 널리 읽히는 「메노케이오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모든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한다. 그는 순간적이고 격정적인 쾌락보다 잔잔하고 지속적인 평정의 상태를 최고선으로 제시한다. 핵심은 욕망의 구분이다. 자연적이면서 필수적인 욕망(먹을 것, 머무를 곳, 우정)은 충족시켜야 하지만, 자연적이거나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과시욕, 과도한 사치, 끝없는 권력욕)은 절제해야 한다.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적게 필요로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자신의 욕망 목록을 조용히 점검해 보게 된다. 무엇이 진정 필수적인가, 무엇이 단지 습관적인 과잉인가.

이 관점에서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향락주의자가 아니라, 빵과 물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하는 소박한 윤리학자에 가깝다.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행복』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 쾌락을 절제된 삶의 형식과 결합된 행복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쾌락과 행복, 현대 인문학의 질문들]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 책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은 ‘고통의 부재’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가. 행복을 부정적 상태(결핍의 없음)로 규정하는 그의 입장은, 긍정적 충만과 창조, 자기실현을 강조하는 현대 행복론과 생산적인 긴장을 이룬다. 둘째, 쾌락과 행복의 동일시는 오늘날의 복잡한 삶―노동, 정치, 기술, 관계―을 제대로 포괄할 수 있는지, 아니면 특정 역사적 맥락에 국한된 처방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제한성 때문에 이 텍스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과잉 소비와 욕망의 가속, 정보 과부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쾌락의 본질은 더 많이 누리는 데 있지 않고, 덜 필요로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가르침은 낯설면서도 묵직한 설득력을 지닌다. 독자가 이 한 문장을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일상적 선택들이 어느 기준 위에 서 있는지 달리 보일 것이다.

[고전 텍스트, 현대 독서의 기반]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원전 텍스트와 함께 역자의 해설과 후기가 충실히 실려 있다는 점이다. 현존 에피쿠로스 텍스트의 기본 구조를 정리해 주는 해설은 철학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고, 번역과 편집의 한계를 솔직하게 밝히는 후기는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 유용한 작업 노트가 된다. 강의나 세미나의 기초 텍스트로도 손색없는, ‘고전 입문서이자 자료집’의 성격을 두루 갖춘 책이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고대의 거울]
결국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행복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피쿠로스는 그 답을 ‘쾌락’이라는 단어에 담지만, 그의 쾌락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풍요와 향락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죽음·신·운명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난 평정, 우정을 통해 공유되는 삶의 기쁨, 그리고 적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행복』은 고대의 정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며,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길 때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쾌락은 더 이상 가벼운 유흥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진지한 윤리학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인문학적 사유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고전적 편지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 구조와 행복의 정의를 다시 쓰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독자는 자신이 어떤 삶을 ‘쾌락적’이라 부를 것인지 조용히 결정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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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생각 수업 - 수학자는 어떻게 발견하고 분석하고 활용할까, 개정증보판
이광연 지음 / 향기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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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책이라고 하면 아직도 마음이 조금 긴장됩니다. 많은 분들이 그럴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수학은 늘 ‘공식 외우고 문제 푸는 과목’으로 느껴졌고, 성적이 곧 수학 실력이었던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요.

『피타고라스 생각 수업』을 읽으면서, 저는 수학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수학은 정답을 맞히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차분히 바라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생각** 도구로 소개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팔리는 치킨은 몇 마리일까?”, “시카고엔 피아노 조율사가 몇 명이나 살고 있을까?” 같은 질문을 수학적으로 추측해 보는 장면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대목입니다. 숫자를 다루는 연습인 동시에, 일상의 궁금증을 논리적으로 풀어 보는 놀이가 되지요.

이 책에는 피타고라스뿐 아니라 유클리드, 페르미, 가우스, 힐베르트, 허준이 같은 수학자들의 이야기가 짧은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분수, 함수처럼 익숙한 개념에서 프랙털, 리만 가설처럼 다소 어려운 내용까지 등장하지만, 설명은 최대한 쉽게 풀어 쓰여 있어서 수학이 부담스러운 독자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각 장이 공부를 강요하기보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 하고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느낌이라, 부모님과 아이가 함께 읽으며 대화를 나누기 좋은 구조입니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아이들이 자주 하는 질문, “수학을 왜 배워야 해요?”에 부드럽게 답해 줍니다. 저자는 수학을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문제를 찾는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여러 상황 속에서 진짜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구조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힘이 바로 수학적 사고라는 것이지요. 성적을 위한 공부를 넘어,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을 길러 주는 공부로 수학을 바라보게 해 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또 한 가지 마음에 남는 점은, 이 책이 수학을 다시 ‘사람 이야기’로 돌려놓는다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절제된 삶, 힐베르트의 난제, 허준이 교수의 연구 과정이 단순한 업적 나열이 아니라, “지식이 우리 삶을 어떻게 넓혀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아이들에게는 수학자가 단지 어려운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깊이 생각하는 사상가라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고, 부모님에게는 자녀의 수학 공부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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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거울 - 파국의 14세기, 흑사병, 백년전쟁, 그리고 움트는 혁명
바바라 터크먼 지음, 박중서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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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재앙을 처음 겪는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믿음을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부수어 왔다. Barbara W. Tuchman의 A Distant Mirror: The Calamitous 14th Century(1978)를 손에 들면서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은 14세기가 아니라 지금 이 세계였다. 팬데믹의 기억, 전쟁의 귀환, 공동체의 균열—이 모든 것들이 이미 한번 일어났다는 감각. 역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이 감각, 즉 인류가 이미 여기를 지나간 적 있다는 쓸쓸하고도 단단한 인식이다.


터크먼은 14세기 프랑스 귀족 엥게랑 드 쿠시의 생애를 종축으로 삼아 시대 전체를 직조한다. 이 선택의 탁월함은 단순한 서사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쿠시는 프랑스인이면서 잉글랜드 왕의 사위였고, 기사이면서 외교관이었으며, 봉건 질서의 정점에 선 자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목전에서 바라본 자였다. 그는 경계 위에 선 인간이었다. 역사의 단층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 터크먼은 자신의 서술자를 세워둔다.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비극적 숭고에 가깝다. 흑사병이 마을을 통과한 뒤의 침묵, 크레시 들판에서 철갑 기사들이 장궁 앞에 꺾이는 순간, 두 교황이 동시에 파문을 퍼붓는 교회의 희극적이고도 처절한 분열—터크먼은 이 장면들을 연대기적 사실로 나열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인간의 피부 위에 새긴다. 죽음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성당을 짓고,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 완강한 생의 의지야말로 재앙의 세기를 가로질러 터크먼이 끝내 건져올리는 것이다.


'먼 거울(a distant mirror)'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쓰기에 관한 하나의 윤리적 선언이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현재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반사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거울은 멀리 있고, 유리는 늘 약간 굴절되어 있다. 터크먼은 그 굴절을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14세기와 지금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그 거리의 무서운 짧음을 동시에 감각하게 만든다.


재앙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바꾼다. 그것이 이 책을 반세기 가까이 독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게 한 힘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다. 14세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라는 예감,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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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사회 - 감정은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가
마렌 우르너 지음, 마정현 옮김 / 다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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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렌 우르너 『Radikal emotional: Wie Gefühle Politik machen』 리뷰

정치는 원래 이성의 영역일까, 감정의 영역일까. 독일 신경과학자 마렌 우르너의 『Radikal emotional: Wie Gefühle Politik machen』(영어판: Radically Emotional: How Feelings Make Politics)는 이 질문에 “정치는 결국 감정의 협상 과정”이라고 답한다. 정치에서 감정을 빼야 한다는 오래된 상식을 뒤집고, 감정을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다시 불러들이는 책이다.

세 가지 키워드: 주의, 정직, 연결

우르너는 책 전체를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간다.
첫째, 근본적 주의. 우리는 뉴스를 보거나 토론을 할 때, 머릿속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화가 나는지, 두려운지, 냉소적인지부터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근본적 정직성. 내 판단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과 선입견을 숨기지 말고, 스스로 솔직하게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셋째, 급진적 유대. 기후위기, 젠더, 불평등처럼 논쟁적인 이슈에서 서로를 ‘적’으로만 보지 말고, 감정을 매개로 다시 연결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이 세 가지를 묶어 보면, 책은 결국 “감정을 잘 읽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감정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다시 관계를 맺자”는 일종의 감정 사용 설명서를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안한 시대, 뇌과학으로 읽는 유권자

이 책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때문이다. 기후위기, 전쟁, 경제 불안, 혐오 정치가 겹치면서 많은 사람이 상시적으로 불안과 분노, 무기력을 오간다. 우르너는 이런 상태를 신경과학과 심리학 연구를 통해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장기적인 계획보다는, 눈앞의 불안을 줄여 줄 단순한 해답에 끌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기 상황일수록 “깊이 생각하자”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감정이 어떻게 우리의 판단을 좁게 만들고, 어떤 메시지에 쉽게 휘둘리게 만드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언론과 정치인들에게도 역할을 요구한다. 공포와 분노만 자극하는 뉴스와 캠페인 대신,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함께 풀어 가는 ‘건설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장점: 어렵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이 책의 장점은 “전문적인 내용을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뇌과학과 심리학, 정치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문장은 가능한 한 일상적인 예시와 함께 풀어낸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뉴스를 보며 느끼는 감정’에서 이야기가 출발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또한 기후위기, 혐오 표현, 온라인 갈등 등 지금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이건 학술 이론이 아니라, 바로 내 일상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시민, 활동가, 교사, 언론인 모두에게 두루 참고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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