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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ㅣ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평점 :
박화성과 박서련,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기다리고 기다리던 작가정신의 ’소설,잇다‘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박화성과 박서련이다. ’소설,잇다‘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는 시리즈로, 각 작가에 관한 편집부의 설명, 소설, 현대 여성 작가의 에세이, 그리고 평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알찬 구성인데, ’소설,잇다‘를 한 권 읽으면 밀도 높은 일 주일 간의 작가연구 수업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든다.
목차는 박화성 작가의 소설 「하수도 공사」, 「홍수전후」, 「호박」, 박서련 작가의 소설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에세이 「총화」, 그리고 전청림 평론가의 해설 「물의 시간과 고요한 약속」으로 이어진다. 가부장제 계급 사회의 현실을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그려낸 박화성 작가의 소설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대담하고 단단한 서술과 흥미로운 전개가 결합되어 고요히 흐르는 듯한 물의 서사. 그러나 잔잔해 보이는 물결 속에는 첨예한 문제 의식이 커다란 해일을 일으킬 것처럼 잠겨 있다.
책의 제목이자 두 소설을 잇는 키워드가 되어준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하수도 공사」에서 부당한 이유로 받지 못한 공사 대금을 돌려받고자 투쟁하는 동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용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둘의 계급 차이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용희에게 청혼하지 않는다.
54쪽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의 진과 림은 애인 사이로, 명목은 독서감상이고 실체는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위한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림은 훗날 회장이 되어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이뤄내고자 하는 진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만, 진은 동아리 부원들에게 자신들의 연애 사실을 밝히자는 림에게 ‘레즈비언 여자 총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 의사를 내비친다.
동권과 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수행해나가는 진취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적극적으로 이뤄나가는 미래에서 용희와 림은 각각 배제된다. 그들의 관계가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마 동권은 용희와 함께 투쟁하며 나아가는 선택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이는 비단 동권과 용희의 계급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박화성 작가는 세 소설을 통해 공통적으로 ’중요한 일‘에 여성을 포함시키지 않는 가부장제의 고요한 폭력성에 대해 고발한다. 용희는 자신과의 연애가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는 동권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강경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용희가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이는 백 년의 시간을 지나, 그럼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정세 속 림의 목소리로 재현된다.
202쪽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는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아마도 용희는 동권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예요.
과연 정세에 합당한 연애는 무엇인가. 림은 정세에 합하지 않는 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동권과 진은 연애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혐오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여성 퀴어로 살아가는 진의 사정은 훨씬 복잡할 터다. 더는 배제되고 지워지지 않도록 총여학생회를 재건하여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는 진의 목적을 고려하면, 림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렇기에 림의 목소리는 더 큰 의미를 얻게 된다. 실제로 말한 것인지 상상 속인지 알 수조차 없게 홀린 듯이 내뱉은 발화에는 또렷한 진실성이 살아숨쉰다. 아주 분명하고 단단한 방식으로.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다’는 문장은 림 자신뿐만 아니라 연인인 진, 그리고 활자 너머의 용희의 존재까지 포함하는 언어가 된다. 또한 이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또렷한 구심점이 되어줄 것이다. 림을 오롯이 바라봐주고 긍정해주는 연인 진에게, 같은 신념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는 동아리 부원들에게, 각자의 정세 속에서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백 년을 넘어 비로소 묵직하게 통과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용희에게.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