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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 ㅣ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평점 :
이 소설은 피해자인 동생 ‘로아’가 가해자인 언니 ‘상은’의 시선으로 자신이 겪은 폭력을 회고하는 형식을 띤다. 가해자의 사고를 쫓으며 폭력적 서술에 몸을 맡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다만 무수히 쌓인 폭력의 껍데기를 하나씩 벗기다 보면, 이 소설이 힘겹게 고발하려 한 폭력의 앙상한 실체가 드러난다.
11쪽
이야기를 들으면 가해자가 수두룩한데 주위를 보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수두룩했다. 모두가 다 피해자인데 도대체 누가 가해했다는 말인가? 상처를 줬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 많은 상처는 다 어디서 비롯된 걸까? 모두가 가해자라 가해자가 없는 걸까?
상은은 제가 겪은 모든 일들을 로아의 탓으로 돌리며 그의 존재를 철저히 짓밟는다. 언뜻 보면 이 폭력의 가해자는 상은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이 끊임없이 지속될 때, 가정이라는 사회 내에서 묵인될 때, 방치라는 형태의 승인을 얻을 때, 이는 더 이상 한 사람만의 폭력이 아니게 된다. 상은과 로아의 엄마 기주는 오로지 자기연민에만 사로잡혀 사는 인물로, 상은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는, 아무런 해결도 낳지 않는 믿음을 앞세워 두 딸을 방치한다. 한 지붕 아래서 펼쳐지는 폭력의 연쇄 속에서 로아는 오래도록 혼자인 채 고통받는다.
144쪽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몰이해의 증거일 뿐이니까.
초중반 부분을 읽으면서, 소설이 결국에는 가해자의 서사를 통해 그를 이해하게끔 유도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소설은 어떤 것도 유도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당위성을 심어주지도, 면죄부를 쥐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처지에서 호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집안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가해 사실을 공고히 한다.
죽음 앞에 놓인 로아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망가뜨린 폭력의 본질을 꿰뚫어야 했을 것이다. 이는 전부, 다시 피어날 로아를 위한 것. 반드시 승리할 생존자 로아의 이야기.
157쪽
어떤 관계는 죽어야 끝난다.
용서도 화해도 없다. 잊지도 않는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