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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평점 :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땐 저자가 사랑하는 소설들에 관한 산문이리라 짐작했었다. 소설가 정용준이 사랑한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밑줄과 생각』의 전반적인 내용은 짐작과는 조금 달랐다. 읽으면서 깨달았다. 자신의 지난하고 아름다운 삶에 스스로 새긴 밑줄이며, 그 우직한 선과 함께 돋아난 숭고한 생각임을.
쓰는 자는 안다. 언어는 생각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매 순간 한계는 느껴진다. 뭘 쓰든 왜곡되고 생략될 것이다. 오해되고 오독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생각을 생각에 그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 애를 쓴다.
69쪽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이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래 놓고 또 뭔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속고 속이고, 영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환상을 믿으려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별을 향해 전개되는 서사지만 우리는 그것에 또 한 번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투신할 것이다.
87-88쪽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향해 부탁하는 마음으로 쓴다. 주문을 외는 심정으로 쓴다. 주술적인 믿음으로 쓴다. 그리하여 미래의 나는 이것 또한 사랑의 한 방식이었다고 고백하는, 믿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152-153쪽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밑줄을 치느라 아주 느린 독서를 했다. 그만큼 좋은 문장이 훨씬 많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읽고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췌를 줄였다.
‘한 줄의 문장’, 즉 1부를 읽을 땐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단단한 의지와 사유에 감화되어, 아픔과 회복을 함께하는 듯한 경험을 했다. 지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독자들에게 힘찬 격려를 전하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도 고마웠다. 2부를 지나 3부로 갈수록 그의 사유는 깊고 풍부해진다. 어려운 문제에 관해 말하는 부분에서도 난해한 느낌이 나지 않아 좋았다. 늘 자신의 제자리를, 쓰기의 원점을 찾아 그곳으로부터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용준과 문학은 단단한 매듭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문학을 향한 애증 가득한 그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문학으로부터 얼마나 큰 기쁨을 얻었을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생각하며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는 마음이란. 그 단단한 사랑이란.
우리에게 내보인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정용준이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그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든다. 소설가의 산문을 읽는 경험은 이토록 특별하고 소중하다. 소설로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문장. 여전히 섬세하지만 낯선 언어로 이루어진, 어쩌면 작가의 말을 아주 길게 늘여쓴 듯한 이야기. 빠져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소설가 정용준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물론이고, 그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