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 동서양을 호령한 예술의 칭기즈칸 클래식 클라우드 18
남정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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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예술이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있다.'

어쩌면 말은 무언가를 이룬자의 오만함으로 비춰질수도 있지만 나는 말이 좋다. 예술을

곳에 있거나 범접하기 어려운 것으로 치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가까이 있는 그것이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되어 우리 삶에 녹아 지는 ,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그런 그이기에

모방이나 베끼기는 없다.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그것에 대해 완벽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에 전에 없던 그것이 항상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백남준을 해외파로 알고 있다. 해외에서 배워서 해외의 문물과 예술 감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맞다. 대부분의 성인시기를 그는 외국에서 보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모두 흡수한 거거덩'.

그도 그럴것이 그는 중학교 '도래미파솔라시' 7음에다가 화음을 곁들이면 완성되는 전통적인

음악을 배격하고 12 기법을 도입한 '현대음악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작곡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아롱(Raymond Aron, 사회학자,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나쁜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남김) '지식인의 아편'에서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지식인들의 무비판적인 수용과 그들의 행동을 아편중독자라고 평할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이 심취했던 카를 마르크스를 경기보통학교에 들어가면서 접하게 되고 이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결국 그는 도쿄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더욱 쇤베르크에 열광하고

졸업논문을 쇤베르크에 대해서 썼을 정도며 쇤베르크를 알게 것을 자신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서

' 1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이 다니는 길로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백남준의 과거 미국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어릴적에도 다니던 길이

아니라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길을 골라 다니곤 했다. 그는 침대도 없이 테이블과 온갖 잡동사니 뿐인

지하 창고에서 살았다. 혼돈의 세상 속에서 희안하리만치 멋진 예술을 창조해 냈고 세간의

이런저런 질타와 혹평을 받긴 하지만 그의 인생의 역작인 'TV 부처' 같은 대작을 만들어 낸다. 그는

진정한 천재다. 그래서 저자는 백남준을 '20세기의 다빈치'라고 부른다. 다빈치 시대에 다빈치가 미술,

과학, 음악, 종교등에 업적을 이루었다면 현대의 백남준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업적들을 방면에서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창조력은 폭이 광대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전위음악, 미디어아트,

사상, 노스텔지어, 플럭서스, 퍼포먼스, , 쌍방향 소통'이라는 단어들로 설명한다. 어쩌면 예술의

경지는 종교적 승화가 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남준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파격, 괴짜, 광기, 변화무쌍'등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파격적이고, 그의 행동은 괴짜스럽고, 그의 예술혼은 광기에 가깝고, 그의 창조력은 변화무쌍하다.

이러한 그의 작품이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에 있다. 이곳의 지번은 백남준로 10이다.

그곳에 가면 TV 물고기가 반갑게 맞아 줄것이다. TV 안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는 우리의 생각에 많은

물음표를 준다. 그리고 물음표는 백남준이 우리에게 던지는 없이 많은 질문 하나일것이다.

이곳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과 원주 뮤지엄 산에 가면 백남준의 다른 예술 세계를 있다.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예술은 독재 혹은 창작자 혼자만의 예슬이라고 말하는 백남준은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소통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예술 세계에 가려져

소통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의 전향적인 소통 의지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소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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