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야사 1, 2
박홍갑 著/주류성
. '야사'는 왠지 지어낸 것 같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됩니다. '정사'가 더 공적인 자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승리한 자'의 맘대로 쓰여지는 것이라 신뢰도에 흠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 편찬의 기초자료가 되는 사초는 사관들의 엄정한 잣대로 기록 되어야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오백년을 이어가는 왕조에서 그 정착과정들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았으니 세조 승하 후에 그 일대기를 담으려는 실록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기에 이긍익도 ‘민수의 사옥’이란 제목으로 <점필재집> 내용을 차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야사'에 대한 편견을 갖기보다는 '정사'와 '야사' 모두 다 참고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신뢰할만한 역사를 해석해내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사학자 박홍갑이 조선의 건국 때부터 숙종 때까지, 역대 임금 재위 별로 야사를 담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바탕으로 왕조의 야사를 정리하고, 연려실기술 이후의 100년은 正史와 여러 문헌을 버무려 구성한 오백년 조선왕조야사이다 저자 박홍갑은 1980년대 중반이래 줄곧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우리역사와 문화에 대한 뿌리와 줄기를 찾아 학술적 성과를 대중성 있는 글로 바꾸어 <사관위에 하늘이 있소이다.> <양반나라 조선나라><승정원일기><우리 성씨의 족보 이야기> 저술한 바 있다.
‘연려실기술’은 사건의 전개과정과 당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기사본말체라는 서술형태를 취하면서 당파적 편견을 배제하고 가급적 공정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기술하고자 한 사실에 대하여 저자의 견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인용서목을 첨가하고 있는 점은 역사의 객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근대 역사학의 정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사육신을 두고 방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등 여섯 사람을 지칭해 왔지만 추국과정을 살펴봐도 상삼문과 박팽년이 주모자였다는 정도만 드러나고 있을 뿐 실록 그 어디에도 여섯 신하를 콕 집어 심문했다거나, 육신이라 칭했던 사실이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이 사육신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렸으니 그것은 남효은이 지은 <육신전> 때문이다.”(P281)
“ 일찍이 류성룡과 이발이 서로 틈이 있었는데 김성일 이성중, 이덕형등이 류성룡의 우익이 되었고 정여립 최영경, 정인홍, 등이 이발의 우익이 되어 서로 배척했지만 그래도 형적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5-6년후 지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을 위시한 서인을 대하는 입장에 따라 남북의 분열이 있게 되었다. 기축옥사에서 동인들을 얽어맨 정철의 처분을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쪽이 북인 이었고 다소 온건론을 펼친 쪽이 남인이었다.”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삼으려하니 정랑 남이공이 합당치 않다고 거절했다. 이데 홍여순의 무리를 대북, 남이공의 무리를 소북이라 했다.”
“ 경자(1600) 봄에 영의정 이원익이 대북을 이끌던 이산해를 견제하려다 체직되고 이산해가 영의정 이산해, 홍여순이 병조 판서가 되어 권력을 다투었는데 홍여순의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공북, 이이첨의 논의를 따른 자를 육북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