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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게 묻다
김희진 지음 / 폭스코너 / 2025년 4월
평점 :
단편소설집은 결코 의미 없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단편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야기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야기는 대체로 상쾌하거나 명확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연극적인 과장된 감정을 드러내면서 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택하고 있다. 이런 느낌의 단편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읽었다.
<<늙은 밤>>의 주인공이 어린아이이고 <<헤어지는 중>>이 남녀 연인의 이야기라는 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은 남성이 중심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부조리한 경험을 하거나 비이상적인 상황에 놓이며, 때로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런 설정들 덕분에 이 책의 이야기들은 더욱 독특하게 다가왔다.
보통 억울함과 부조리함을 호소하는 이야기는 여성의 목소리로 표현될 때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성인 남성을 중심에 두고도 충분히 그 부조리함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다소 익살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주인공의 혼잣말, 욕설, 감정의 기복들이 오히려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오후에게 묻다>>는 오프닝으로서 제격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어느 날 무심코 편의점에 들렀다가 형사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 채 그 자리에 방치된다. 한 손이 묶인 채 길 한복판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그는 온갖 곤경에 처한다.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외면하거나 공격하기까지 한다. 유일하게 순수한 한 아이가 다가오지만, 곧 학원에 간다며 떠나버리고, 비까지 내려 더욱 처량한 상황이 된다. 결국 그는 묻는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걸까? 그럴 운명이었을까?’ 그러나 이 질문은 끝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이야기는 그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끝난다.
이 단편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숨가쁘게 달려든다. 마치 ‘불가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두고 달리는 느낌이었다. 읽는 내내 가난과 고독, 절망과 불합리함이 뼛속 깊이 파고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는 묘한 희망이 스며 있다. 직접 읽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헤어지는 중>>이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변화의 계기를 이야기하던 여성은, 그 중심에 '강아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는 그 강아지가 사실 '로봇'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털어놓는다. 이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한데, 이야기는 마지막까지도 반전처럼 낯설고 묘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제목과 내용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느꼈던 단편 <<거슬림>>. 적화원 집 셋째 아들. 하나부터 열까지 하는 행동이 정말 다 거슬린다. 좋아하는 신발가게 여사장님에게 잘 보이려고 배달을 핑계 삼아 빈집을 찾아다니며 신문투입구로 신발을 한 짝씩 훔친다. 한 짝만 없어지면 그 여사장님이 새로 살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엄마 가게 장사가 잘되라고 붙여놓은 부적까지 뜯어다가 그 여사장님께 가져다준다. 엄마가 점쟁이를 찾아가 주술을 믿는 걸 보고는, “행복이 지치지도 않나 봐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투까지도 정말 신경을 긁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신발을 훔치는 장면을 본 아이가 나타나고, 그 아이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 데가 없는, 그야말로 거슬림의 연속인 이야기아닌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아서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익숙한 감정선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