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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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느다란 햇빛이 바르르 떨면서 덧문 사이로 들어와, 불규칙하게 벽과 테이블을 비춘다. 이 육중한 긴 테이블은 내가 브르타뉴 지방에 살 때 쓰던 것인데 이사하면서 이곳으로 가져왔다. 이 책상에서 나는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카드놀이도 한다. 햇빛은 붉은책이 도는 회벽 위에서는 붉은색으로, 아프리카 유목민들이 쓰던 푸른 면 카펫 위에서는 푸른색으로 변하곤 한다. 책들로 가득 찬 찬장들, 소파들, 서랍장들은 십오 년 동안 나와 함께 두 세 군데의

프랑스 시골 지역들을 돌아다녔다. 유선형의 가는 팔걸이가 달려 있어 마치 손목이 가는 시골 여자들처럼 촌스러운 느낌을 주는 소파들, 손가락을 접어 살짝 튕기면 방울 같은 소리를 내는 노란색의 작은 접시들, 크림색 유약을 바른 두꺼운 흰 접시들, 이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이곳에서 우리의 고향을 되찾았음에 놀라고 만다. 이곳에서 육십 킬로 떨어진 무리옹이라는 마을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집,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을 누가 내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여러 곳에서, 때로는 억센 팔에 의지하여 위안을 얻곤 했다. 정말 그랬다. 여자들은 행복한 사랑을 해본 횟수만큼 많은 고향을 가지며, 사랑의 고통이 치유되는 하늘 아래서 매번 새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소금기어린 이 푸른 해안, 토마토와 피망을 먹으면서 더없이 행복할 수 있는 이곳은 이중으로 나의 고향이 된다. 얼마나 큰 호사인가! 그것도 모른 채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던가! 공기는 가볍고, 포도 그루 위에서 일찍 익어버린 포도송이는 햇빛으로 말라 쭈글쭈글하지만 그 맛이 잼처럼 달다. 마늘 맛 또한 일품이다. 갈라질 정도로 건조한 땅의 위엄 있는 궁핍, 소박한 농민들이 가르쳐준 우아한 게으름, 오, 뒤늦게 찾아온 나의 행복이여...... 불평하지 말자.

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제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젊었더라면, 모난 나의 젊음은 겹겹이 쌓여 번쩍거리는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솔잎에, 용설란에, 성게 가시에, 송진이 끈적거리는 관목들에, 그리고 이파리 뒷면이 맹수의 혓바닥처럼 생긴 무화과나무에 찔릴 때마다 피를 흘리곤 했을 것이다. 얼마나 근사한 고장인가!

(중략)

  한 친구는 늘 내 포도밭을 측량하고, 계단 하나 없이 바로 바다로 통하는 이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결국, 이 집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당신에게 꼭 맞는군요." 나는 여전히 "그래, 그래"라고 대답한다. 마치 그가,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당신은 변하지 않는군요!"라고 나에게 단언할 때처럼 말이다. 그것은 "우리는 당신이 더

상 변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답니다!"는 의미이다.

  그러도록 노력해보련다......" (p19~22)

『여명』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콜레트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방스의 시골 집에서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포도밭과 화단을 가꾸고 동물들을 보살피며 보내는 그녀의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은 행복했던 유년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연결된다. 두 번의 이혼과 파격적인 연애로 떠들썩했던 젊은 시절은 가고 홀로 누리는 고독 속에 충만해지는 날들이다. 그런 그녀에 새로운 사랑이 다가오려 한다. 그것도 15살이나 어린 남자, 그리고 알고 지내는 처녀가 사랑에 빠져있다고 고백한 그 남자가 그녀의 곁을 맴돈다. 




  "빨갛게 빛나는 제라늄과 사람들의 흰 옷, 그리고 폭발해버린 위성들처럼 붉은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수박이 있는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여름. 이 계절이 끝날 때까지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덜 친근해진다면 결과는 달라질까? 하지만 그 무엇도 나의 행복한 여름을 방해하진 못한다. 푸른 소금과 맑은 물이 있는 여름, 창문을 열어 놓고 지내며 바람 때문에 대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여름, 마늘을 줄줄이 엮어 달아놓는 그런 여름을......

  나에 대한 비알의 감정, 그리고 비알에 대한 젊은 엘렌 클레망의 사랑과 원망...... 나는 본의 아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글을 쓴다. 남들에게 웃거리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그렇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곧 잊어버릴 이야기이다. 매일같이 불면의 밤을 보내시던 어머니,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밤을 지새우고 있나요? 지친 말을 와 내 손과 어깨로 짐을 끌어주어야 할 순간에, 진흙투성이 개를 옷 안에 품어 안아야할 순간에, 적의에 찬 시선으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달래고 보호해주어야 할 순간에, 혹은 치명적인 파멸을 향하여 휘청거리는 사랑의 무게를 내 팔에 실어야 할 순간에, 당신은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만일 보통 사람들처럼 은근슬쩍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만다면, 나를 용서하세요. "내 나이에는 단 하나의 미덕밖에 없단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지." 당신입니다. 그런 말을 하신 분은. 사랑하는 어머니, 나는 당신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신발에 진흙을 거의 묻히지 않은 채 밖을 돌아다니던 당신을 나는 기억합니다. 아직도 햇살이 따사로운 좁은 골목에서 편안한 자세로 똬리를 틀고 있는 작은 뱀

을 피해 발길을 돌리던 당신의 가벼운 발걸음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p82~83



  그녀의 기억은 끊임없이 어머니에게로, 유년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재현되는 어머니는 정이 많은 시골 아낙네이면서도 나이들어서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품위를 지켰던 숙녀이다. 매 순간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그녀의 서술은 한 명의 딸로서, 그 자체만으로 인상적이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으로 삶을 살고 어머니와 동일시 되고자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은 낯설기도 하다. 유년 시절에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였지만 성장 이후 벗어나고 싶은 그늘같은 대상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그렇기에 어머니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절대적 친밀함과 어떤 숭고함은 차라리 부러웠다고 고백해야겠다. 인생의 모델이자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리라.  

 

 실제로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했던 작가 콜레트, 그녀는 인생의 황혼기에 16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여명』에 등장하는 연하의 남자는 세 번째 남편을 모델로 삼았지 싶어진다. 금기와 터부를 깨고 사랑과 인생에 솔직하고 주체적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여명』에서 콜레트는 비알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으로 대표되는 고독의 기쁨과 평화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흔들리지 않는다. 쉽사리 사랑에 빠지고 그 감정과 대상에 기대거나 속박되곤 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그녀는 이제 자신을 오롯이 지킬 수 있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늙었구나'라고 생각되는 나이(소설 속에서 그녀의 나이는 오십이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에서도 여전히 빛날 수 있는 것은 그런 단단함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사랑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의 치기가 아닌 지혜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돌아보며 서두르지않을 뿐이다. 대신 그녀는 여전히 생기있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자연을 찬미한다. 그런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도 우리는 늙지 않을 것이다.

 



  "창백한 푸른빛이 내 방으로 들어오고, 아주 연한 붉은빛이 그 푸른 빛을 어지럽힌다. 새벽이다. 새벽빛은 밤으로부터 빠져나와 긴장한듯 찬란하게 흐른다. 내일 아침 이 시간에 나는 첫번째 포도 수확을 위해 포도송이를 따고 있을 것이다. 내일모레 이 시간이면, 이 시간보다 일찍, 나는...... 아니 그렇게 앞서가지 말자, 그렇게 서두르지 말자!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순간의 목마름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를! 창에서 뛰어내린, 아직 정체불명의 이 새벽이라는 친구는 전히 방황하고 있다. 변화하는 형태를 완성할 시간이 부족했는지, 그것은 땅에 닿은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그것은 숲이 되었고, 물보라가 되었고, 별똥별이 되었고, 무한히 펼쳐지

는 책이, 포도송이가, 배가, 오아시스가 되었다......"

p175~176




 어머니에 대한 회상과 자기 고백적인 문장이 이어지는 책은 소설인지 에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초반까지만해도 줄거리를 파악할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책을 읽는데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감각적으로 서술한 문장들을 읽노라면 이야기는 사라지고 생생한 미적 감각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그녀의 문장을 만나면, 몇몇 작가들이 칭송하는 '콜레트'의 매력이 무엇인지 오감으로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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