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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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다른 사람의 기막힌 인생을 듣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편하게 기대고 있던 등이 나도 모르게 곧추세워져요. 내가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을 두고 뭐가 이렇게 시시하담, 싶어 권태를 느꼈던 것을 상대가 알까 싶어 미안해지는 때가 그런 때예요. 어제 같은 오늘이란 말의 뜻이 권태나 무료가 아니라 별일 없이 무사하다는 뜻이란 것을 실감하는 때이기도 하구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이 년이나 병원신세를 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가 하면, 작별인사를 할 틈도 없이 가족과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고, 뱃속에 삼 개월 된 아이를 가지고 있는 상태로 갑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그럴때 보면 마치 이 세상은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가득 차 있는 듯해요. 생각해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는 살고 싶었으나 살지 못한 시간이기도 하겠지요. 그래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가능한 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에게도 끝없이 절망적이던 이십대가 있었다. 매일같이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는 내 존재 자체가 버겁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때엔 "서른"이라는 시대가 마치 구원처럼 이 모든 답답함을 끝낸 "안정"을 가지고 올 거라 믿기도 했었다.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나는 불현듯, 이십대 때 바라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나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를 숨긴 채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나를 마주한다. 그리곤 내가 꿈꾸던 "서른"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버리고 싶은 나는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자주 만나는 "암울한 이십대"를 덮어버린 채 서른을, 마흔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안쓰럽고 더 마음이 가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작년 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 후, 일 년이 지나고 만나는 신경숙의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 목차를 훑어보곤 제일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제일 마지막에 실려있는 「모르는 여인들」이었다.  "나"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정윤"인 것 같고, "채"는 "단이"같기도 한, 신경숙 소설에서 이미 만났던 것 같은 인물들이 또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길지 않은 과거 서술만으로도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다 알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이야기에 몰입한다.

 "나"는 한창 출판사 일이 바쁜 시점에, 무릎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그 때 갑자기 옛 남자친구 "채"에게서 연락이 오고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너를 생각하곤 했다"며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나"는 이십년 만에 만나는 "채"에게서 암선고를 받은 아내가 가족들에게서 도망친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는 병원에 누워있는 남편을 생각하게 된다.

 이 짧은 단편을 읽는데 어느 단락들에선가 '이건 내 이야기인데'하며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닿는 느낌 때문에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아주머니, 노트 한 권을 두고 소통하는 채의 아내와 집안 일을 돌봐주는 아주머니, 채의 아내가 병원 앞에서 만난 택시 기사의 이야기는 서른을 넘어 경험한 일들로 공감 영역대가 확장된 나에게 또 다른 울림을 남긴다. 작가의 말에 언급된 것처럼 혼자 살아온 줄 알았던 인생은 결코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주고 받은 영향이 고스란히 나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야말로 진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이 "어른"을 만든다는 것도...... 
  

   
 
...내가 새삼스런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_'작가의 말'에서

 
   

 

대학시절 방바닥에 엎드려 하루 종일 붙들고 있었던 『외딴방』에서부터 서른이 훌쩍 넘어 읽는 『모르는 여인들』까지, 내가 성장(?)하는 만큼 신경숙의 글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비판하기도 하는 신경숙 식의 슬픔과 우울의 미학, 특유의 인물과 과거 스토리의 반복이 또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오래도록 신경숙의 작품들이 내 곁에, 그리고 연결된 모든 사람들 곁에 놓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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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6 14: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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